2015년 라오스의 대학생이 라오스 새마을운동을 연구한 논문을 발표하여 화제가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 여러 기관에서 새마을운동을 전수하는 나라는 24개국이지만 자국민 스스로가 새마을운동에 대한 발전상을 논문으로 체계화한 나라는 라오스가 유일하기 때문이다. 논문뿐만 아니다. 라오스 새마을운동에 대한 현지인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유래없는 시너지를 내고 있다. 라오스가 새마을운동을 체계적으로 받아드리고 있는 그 기저(基底)에는 김호경 세무사의 헌신과 봉사가 있었다. 10년째 이어지는 그의 활동은 라오스 새마을운동으로 체계화되었고 라오스 발전의 견인차가 되고 있다. 라오스에서 ‘행복을 전하는 한국 할아버지’로 불리는 김호경 세무사를 만나 라오스 새마을운동의 비전에 대해 들어보았다.
기자가 처음 김호경 세무사의 집무실을 방문했을 때 두 번 놀랐다. 지난 10년간 라오스 봉사활동이 체계적으로 정리된 부지런함에 놀랐고, 방대한 자료와 다양한 활동에 또 한번 놀랐다. 가장 최근의 활동이 정리된 2014년 9월부터 2015년 8월까지의 보고서책자만 살짝 훑어도 ‘감귤특화지역 개발계획’, ‘교수들을 위한 새마을운동 프로그램’, ‘지역사회개발 세미나’, ‘살기좋은 마을 책자번역 제본’, ‘라오스 삼상정책과 새마을 운동의 접목’, ‘장학금 수여’ 등 굵직굵직한 사업들이 두꺼운 연간보고서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개인이 주축이 되어 이룩한 성과로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다양한 활동이었다.
김호경 세무사의 라오스 새마을운동은 라오스 국영TV 뉴스는 물론 각종 방송프로그램과 신문에도 크게 보도되고 있다. 김 세무사를 비롯해 라오스 현지 주민과 교수, 학생 등 새마을운동에 참여하는 모든 사람이 태극기가 새겨진 조끼를 입고 대중매체에 대한민국을 소개하고 있다.
김 세무사가 기자에게 첫 번째로 강조한 ‘국가관’과 ‘대한민국 홍보’를 몸소 실천하며 우리나라를 해외에 알리고 있는 것이다.
라오스 새마을운동의 아버지
‘새마을운동’은 근면, 자조, 협동을 생활화하는 의식개혁운동이다. 김 세무사는 라오스를 위한 봉사활동을 꾸준히 진행하던 중 근본적으로 라오스의 생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우리나라 산업발전의 원동력인 새마을운동의 재현이 필요하다는 생각으로 대학생 새마을운동 지원을 시작했고, 2011년부터 라오스 제1국립대학 사회학과 부설 지역사회개발 교육프로그램의 후원자로 참여했다. 김 세무사의 열정에 학생들과 라오스 제1국립대학 교수들도 새마을운동에 발 벗고 나섰고 이제는 관련지역 모두가 참여하는 운동이 되었다.
라오스 새마을운동의 아버지인 김호경 세무사가 라오스를 처음 만난 것은 꼭 10년전의 일이다. 마침 그의 나이는 환갑이었고 지금까지 자신을 위해 열심히 살아왔으니 이제는 남을 위해 살아보는 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어 2006년 무앙톨라콤 학사이 마을 초등학교 건축 지원을 시작했다고 한다. 그 당시엔 교과서를 가진 사람이 전체 학생들 중에서 10분의 1 정도밖에 되지 않을 정도여서 학생들과 교사들에게도 각각 필요한 교육기자재를 지원하며 봉사를 시작했다.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다음해에는 유치원을 건설했습니다. 학교와 유치원이 새롭게 태어나서 좋았지만, 근본적인 주민들의 소득 증대사업으로 연결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도움 없이도 자립 할 수 있도록 라오스에 특화된 새마을운동 교육 프로그램을 기획하게 되었습니다.”
김 세무사는 우리나라 새마을운동중앙회와 공동기획으로 사업을 추진하기도 했지만 대학교에 특화된 봉사활동을 위해 다시 독립하여 라오스 제1국립대학과 협력사업을 시작했다. 처음부터 무리하기 보다는 단계적이고 체계적으로 사업의 볼륨을 키우는데 주력했다.
‘한국인’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
김호경 세무사는 현재 새마을운동 개발프로그램을 3년 주기로 기획해서 진행하고 있다. 장기 프로젝트는 개인사정으로 일정에 차질이 생길수도 있지만 3년 주기의 프로그램은 개인사정이 생기더라도 충분히 커버가 가능하여 약속한 목표달성을 할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한국인은 반드시 약속을 지킨다’는 이미지입니다. 프로그램 선정에서도 반드시 필요한 프로그램이라면 제 개인의 판단을 통해 빠르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돕습니다. 왜냐면 좋은 프로그램을 하루라도 빨리 진행하는 것은 라오스의 발전과 직결되기 때문입니다.”
김호경 세무사는 대학교를 지원할 때도 처음엔 장학금 수여, 두 번째는 학생현장지원활동과 세미나를 포함했고, 세 번째는 단계별 프로그램을 추가해서 진행했다. 김 세무사는 많은 장학금을 지급했지만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원칙하에 사업을 진행했다. 즉 새마을운동에 대한 리포트 심사 후 결과에 따라 차등지급을 했고, 수혜자들이 현금출납부를 기록하여 근검절약의 습관을 자연스럽게 기르도록 도왔다. 스스로 성과를 터득하며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모든 것은 스스로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진리를 배워가길 바랬기 때문이다.
“교육사업이 어떤 단계를 거쳐 발전해 나가야 하는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합니다. 저는 이른바 ‘육아육성법’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즉 단계적으로 가야 정상적인 교육효과를 낼 수 있습니다. 요즘은 인터넷과 스마트폰이 발전해서, 라오스의 경우에도 도시개발은 부족하지만 스마트폰은 사용하고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를 감안하여 현지에 맞게 발전 방안을 제시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입니다.”
“그들에게 가라, 그들과 함께하라”
10년 전 김 세무사가 처음 라오스와 만났을 때, 당시 그곳은 모든 환경이 열악했다. 아이들은 뛰어놀 운동장도 없었고 제대로 된 학용품조차 없었다. 라오스의 현지를 방문하면서 그는 자신의 어릴적 모습을 떠올렸다.
“저도 어린시절 가난을 직접 경험했습니다. 먹고 사는 것이 힘든 상황이었으니 공부를 한다는 것 자체가 감지덕지였죠. 라오스가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내가 학교만 지어주면 학생들이 즐겁게 공부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에 시작했던 봉사활동이 이렇게 크게 돼버렸네요(웃음)”.
김호경 세무사의 좌우명은 ‘인생을 즐기는 것’, 즉 나이가 무르익으면 움켜지지 말고 베풀어야 한다고. “인생에는 단계가 있습니다. 젊을 때는 24시간 전공분야에 투자하고 열심히 일하며 살아야 합니다. 반면 60세 이후에는 투자에서 손을 떼고 가치 있는 즐길 거리를 찾아야 합니다. 새마을운동의 기본은 바로 내가 잘 살고, 이웃과 마을이 함께 잘사는 것입니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일이 진정 잘할 수 있는 일이며, 동시에 성공의 길이 아닐까요?”
김 세무사는 새마을운동을 과수농법에 비유했다. 즉 과수농법에서 뿌리를 튼튼히 해야 하듯 사람도 뿌리가 튼튼해야 성공할 수 있다는 것.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삶은 순리대로 간다며 웃었다.
김 세무사는 부안의 지정환 신부(본명: 세스테벤스 디디에)의 말씀을 라오스 새마을운동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벨기에 출신의 지정환 신부는 1959년 전쟁으로 폐허가 된 우리나라에 희망을 심기 위해 한국을 찾았고 평생 봉사의 삶을 실천해왔다.
“첫째 그들에게 가라, 둘째 그들과 함께하라, 셋째 그들에게 배워라, 넷째 그들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라. 가장 마음에 깊이 새긴 말씀입니다. ‘우리가 잘사니 당신들에게 가르쳐줄게’라는 마인드는 안 됩니다. 문화, 풍습, 역사, 환경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봉사를 위해선 그 나라에 완전히 동화되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마음씨 좋은 한국 할아버지
김호경 세무사의 봉사활동은 라오스 학생들에게 영원한 추억꺼리를 만들어주고 싶다는 소박한 마음에서 출발했다. 어릴 적 마음씨 좋은 한국할아버지와 같이 공부하고 놀았던 추억은 라오스 학생 개인의 행복은 물론, 한국의 이미지를 영원히 좋은 나라로 남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참으로 어렵게 공부를 했습니다. 낮에는 일을 하고 밤에는 학교에서 공부를 했습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생활비와 학비를 스스로 해결하며 길을 개척해 왔습니다. 나는 라오스 학생들에게도 강조합니다. 앞으로 무슨 일이든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올 것이며, 일을 하지 않는 게으른 사람에게는 그런 기회마저도 오지 않는다고 말입니다. 항상 꿈과 욕망이 강한 사람은 그것을 성취할 기회가 있으나 꿈과 욕망이 없는 사람은 영원히 발전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라오스 학생들에게 ‘할 수 있다, 하면 된다’라는 긍정의 마음가짐을 강조합니다.”
라오스에서 그의 애칭은 ‘행복을 전하는 한국 할아버지’다. 김 세무사가 가장 좋아하는 별명이다. 그는 지금도 라오스를 방문할 때면 늘 태극마크가 달린 조끼를 입는다.
“라오스의 현실을 보노라면 힘들게 공부했던 옛 추억이 되살아나는듯 합니다. 그들은 제 이름을 기억하진 못하더라도 ‘한국 할아버지는 좋았다’는 것은 평생 기억하겠지요.나의 도움을 받은 라오스 학생들이 졸업 후 성공을 하여 조금이라도 나와 대한민국을 기억해 준다면 그것이 나에게 주는 최고의 보답이라고 생각합니다.”
김호경 세무사는 아담한 체구였지만 라오스 이야기를 할 때면 누구보다 활기차고 박력이 넘쳤다. 아무런 조건 없이 라오스를 지원해온 10년의 시간동안 어려움도 있었겠지만, 행복한 봉사를 통해 오히려 건강해지고 젊어진 모습이었다.
그것은 발전하는 라오스의 모습 속에 어려움을 헤치며 공부했던 ‘청년 김호경’의 모습이 투영되어 ‘영원한 젊은이’로 살아왔기 때문이 아닐까. 기자가 만난 김호경 세무사는 ‘한국 할아버지’가 아니라 ‘라오스의 한국 젊은이’였으며 또한 ‘라오스 새마을운동의 거인’이었다. 이양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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