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은 함경북도 청진시 나남동에 한국 최초(1909년)의 유치원인 ‘나남유치원’을 설립했다. 이어 1914년 이화학당 창설자 스크렌돈 부인이 경기도 경성부에 유치원을 설립한 이래 사립유치원의 시대가 시작했다. 1976년 박정희 정권이 대한민국 최초의 공립유치원을 신설했지만 지금까지 한국교육의 뿌리 역할을 한 것은 사립유치원이었다. 그런데 최근 정부가 사립유치원의 현실을 외면한 채, 공립유치원 확대 설치에 관한 무리한 방안을 내놓으며 구설수에 오르고 있다. 이코노미뷰가 사립유치원의 대변자라 할 수 있는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석호현 이사장을 만나 그 내막을 들어봤다.
한국 유아교육의 ‘뿌리 깊은 나무’ 유치원 교육의 중요성을 말해주는 단적인 표현이 있다. "All I Really Need to Know I learned in Kindergarten." 로버트 풀검(Robert Fulghum)의 책 제목이기도 한 이 말은, 우리나라에 1989년《내가 정말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유치원에서 배웠다》로 번역되어 무려 120만부 이상의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무엇이든 나누어 가지라. 공정하게 행동하라. 남을 때리지 마라. 사용한 물건은 제자리에 놓으라. 자신이 어지럽힌 물건은 자신이 치우라' 등등의 내용이 핵심이었다. 나이를 먹으며 잊거나, 알면서도 실천하지 않는 단순한 덕목들이다.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 속담처럼 유아기의 기초교육은 한 사람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만큼 그 영향력이 막대하다. 120여년에 이르는 자랑스런 한국 유치원 역사에서 사립유치원은 유아교육의 거의 모든 것을 책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첨병이었다. 이 가운데 1995년 정식 연합회로 출범한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유치원교육의 전반적인 제도와 교육발전을 위해 앞장서 활동한 단체다. 석호현 이사장은 지난 2008년부터 이사장직을 맡아 회원들에게 큰 신뢰를 받고 있고, 재신임을 얻어 연임으로 이사장직을 수행 중에 있다. 석호현 이사장에게 유아교육에 발들인 계기를 묻자 그는 대뜸 “뭐 다른 것이 있겠습니까? 좋아서 시작한 거죠. 아이들을 돌보고 가르치는 게 좋았어요”라고 말했다. 그는 훗날 유치원부터 초, 중, 고, 대학까지 연계된 학교와 재단을 만드는 것이 꿈이라고 했다. 자신의 건학이념을 널리 알리고 싶다는 것의 그의 포부다. 그가 가진 건학이념은 무엇일까. 현재 경기도 화성시 봉담에서 ‘학촌유치원’을 운영 중이기도 한 석호현 이사장은 ‘21세기의 당당한 주인으로서 지식과 기능을 갖추고 아름다운 인간관계 속에서 자연을 사랑하는 참다운 인격의 기초를 실현하는 것’을 건학이념으로 삼아 학촌유치원에 적용해 실천하고 있다. 유치원을 설립한 이유도 이러한 교육의 큰 가치아래 유아교사로서의 역할 극대화, 유아학교로서의 학습활동의 다양한 경험, 유아학교의 완벽한 경영마인드 극대화라는 교육목표에서 출발했다. 그의 교육이념은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의 활동 취지와도 부합한다. 그동안 총연합회는 한국유아교육 수준 향상에 큰 족적을 남겼다. 석호현 이사장 취임 후 만 3~5세 유아학비 지원을 확대했고 사립유치원 지원근거 마련을 위한 유아교육법 개정, 사립유치원 교원 인건비 41만원 지원 확정(2010년), 수업료 동결에 따른 사립유치원 운영비를 500억 원 확보하는 등 많은 업적을 쌓았다. 지난 2012년에는 공립유치원 신증설 반대 학부모 청원서를 교과부에 전달했으며, 중앙 일간지에 ‘성명서’를 내고 공립유치원의 폐해와 모순점에 대해 지적하기도 했다. 아울러 지난 2005년 제정한 ‘유아교육법’ 또한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의 대표 업적 중 하나이다. 이 법안 제정을 위해 총연합회는 2004년 1월 29일 유아교육법 제정 공포, 유아교육 및 보육에 관한 기본 계획, 유치원 및 보육시설간의 연계 운영, 국무총리 소속하의 유아교육 보육위원 설치 등을 중심으로 법안을 추진했고, 2005년 3월 24일 유아교육법이 제정되기까지 큰 역할을 함으로써 한국유치원교육의 앞선 행정력과 경험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정부도 그동안 유아교육의 올바른 제도 마련에 미지근한 태도를 보였지만 유아교육법이 제정되고부터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이 사실이었다.
유아교육의 근간 된 사립유치원 최근 유아교육계의 가장 큰 이슈는 공립유치원을 확대·설치한다는 정부의 방침이다. 이에 대한 사립유치원 종사자들의 반발도 거세다. 석호현 이사장은 정부방침에 쓴 소리로 일격했다. 그는 “2005년 제정된 유아교육법의 주요골자는 사립유치원을 제도에 가두고 공립유치원을 늘리자는 취지가 아닙니다. 국립과 공립, 사립유치원이 각각의 성격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 교육수준이 열악한 가정을 위해 유치원 등 유아교육기관이 정부로부터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를 마련하여 더 좋은 교육 환경을 만들자는 것이 법 제정의 주요 골자였습니다. 아울러 국립이건 공립이건 사립이건 잘못된 관행과 불법은 법으로 엄정히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것이죠”라며 근본 취지를 설명했다. 이어 “하지만 정부가 최근 발표한 방안을 보면 사립유치원의 현실과 역할을 무시하고 사립유치원을 공립유치원처럼 제도로 편입해 관리, 감독을 하겠다는 것입니다. 120여년 사립유치원의 역사와 환경, 역할을 고작 몇십년 되는 공립유치원의 환경과 동일시하려는 비현실적 행정이 문제라고 봅니다. 공립과 사립유치원에 똑같은 제도를 적용하려면 페어플레이를 할 수 있는 같은 환경이라야 하는 겁니다. 현재 유치원 설립법에 따르면 유치원은 일반 사인(私人)이 지어 경영자가 될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설립자와 경영자의 교육방침에 따라 유치원이 운영되고 진행되어야 맞는 것입니다. 정부가 현행법을 부정하는 모순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같은 교육시스템과 커리큘럼을 요구하는 것을 마치 ‘보편성’, ‘보편화’인 양 생각하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습니다. 사교육 기관인 사립유치원은 기본적으로 공교육과 성격이 다른 것입니다. 이는 공기업이 지어 파는 아파트와 대형건설사 등이 지어 파는 아파트를 같은 값에 팔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중고등학교 또한 특수학교, 영재학교 등 그 분야가 세분화되는 추세에서 유치원 평가를 공립유치원과 일률적으로 적용하겠다는 것은 교육 수준의 하향평준화를 불러오는 것,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실상 지금까지 사립유치원이 유아교육의 질을 높였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 상황에서 현장의 목소리와 분위기를 반영하지 못한 정부의 모순적인 행정이 이런 심각한 상황을 만든 것입니다”라고 성토했다. 또 그는 “일부 고가 사립유치원과 부정부패, 비리를 일삼는 유치원에는 정부 차원의 법적 규제는 필요합니다. 다만, 그 소수 때문에 진정성 있는 교육에 매진 중인 대다수가 매도되는 일은 없어야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말하며 사립유치원을 공교육과 같이 다루는 데 대한 부작용을 설명했다.
공립유치원과의 평준화 아닌, 유아교육의 질 따져야 정부의 이런 모순적이고 시대착오적 발상에 대해 사립유치원에 종사하는 교사와 설립·경영자도 행동으로 나서고 있다. 지난 11월 초에는 서울시를 비롯한 정부의 정책에 항의하는 집회가 서울시 교육청에서 있었다. 이 자리에 참가한 한국유치원총연합회 서울시지회 김애순 회장은 “유아교육을 위해 헌신하는 사립유치원들이 저출산으로 인한 취원아 부족, 공립유치원과의 경쟁 등으로 인해 폐원하는 사례가 속출하고 있다”며 “이는 공립유치원이 본래 설립 취지인 ‘저소득층 자녀 교육’의 뜻을 저버렸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또 석호현 이사장도 “정부는 시립유치원에 학부모 운영위원회 설치를 의무화하고 정보를 공시하는 등 의무만을 지우면서 그에 대한 지원은 소홀하다”며 “시립유치원을 ‘귀족유치원’으로 ‘부도덕’의 이미지로 몰아가는데 일조하고 있다”고 강변했다. 실제로 공립유치원을 확대하겠다는 정부의 방침이 발표되기 전부터 사립유치원은 대형 학교 법인 등에 적용되는 사립학교법과 사학기관 재무·회계규칙을 적용받아 과도한 규제에 시름을 겪어온 것이 사실이다. 이에 지난 4월 15일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이자 민주통합당 신학용 의원은 비현실적인 유치원 운영권 승계절차 및 회계제도를 대폭 개선하는 내용의 유아교육법 및 사립학교법 일부개정안을 발의하기도 했다. 신 의원이 발의한 유아교육법 개정안에 따르면 현재 국·공립유치원만 누리고 있는 유치원 전용 재무회계제도와 같이 사립유치원에도 특화된 재무회계제도를 신설해 법률과 현실의 괴리를 줄이며, 유치원 설립자의 법적 지위를 보장하고, 사망으로 인한 상속·경매 등의 경우 유치원 운영의 연속성이 끊이지 않도록 보장해 원생들과 학부모를 보호하자는 내용을 담고 있다.
정부, 유아교육에 대한 깊은 사유 필요 앞서 밝혔듯이 우리나라 사립유치원의 역사와 교육의 질은 단시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유치원 교육의 커리큘럼 역시 나이테가 지긋하다.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피아제, 프뢰벨 등도 그렇게 성장했다. 또한 유치원 교사들은 보육교사와 다르다. 교직과정을 이수해야만 자격이 주어진다. 보육이 중심인 어린이집과 교육이 목적인 유치원의 교육 수준과 질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다. 정부의 여러 규제에도 불구하고 한국유치원총연합회는 2013년 사립유치원 회계·관리 프로그램을 보급했고, 사립유치원 실정에 맞는 재무회계 규칙을 마련하는 등 자구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2014년에도 사립유치원 설립자의 법적지위 보장 등을 위한 유아교육법 개정을 위해 노력하는 동시에 사립유치원 정부 지원방식(바우처)에 대한 연구용역 추진과 시설환경개선을 위한 융자 지원기관 확대 등에 매진한다는 계획이다. 중장기적으로는 만 3~5세 유아에 대한 무상교육을 추진하는 한편, 사립유치원 관련 100여 개 법조항에 대해 현실성에 맞도록 개정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겠다는 비전도 가지고 있다. 우리나라 근현대 작가 중, 최고의 시인이라 불리는 <사슴>의 백석(白石 1912~1996) 선생이 그의 애제자이자 후에 한국 아동문학의 대표작가가 된 강소천 선생에게 한 말은 인상적이다. “그 나라 말을 오래 보존하는 길은 오직 한 가지, 그 나라 문학을 높은 수준에 올리는 것이다. 또 하나 우리나라 말을 후세에 이어가게 하는 방법은 좋은 아동 문학 작품을 남기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문학사의 거장인 백석 선생은 문학인생 말미동안 아동문학에 몰두하며 지냈다고 알려졌다. 왜 그는 아동문학에 심취했을까. 또 로버트 풀검은 왜 유치원에서 모든 것을 배웠다고 말할까. 진정한 의미의 보편적 교육은 공교육의 획일화된 틀에 의해 만들어 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공교육이건 사교육이건 각각의 방향으로 교육의 질을 높이는 것이 평준화고 보편성이다. 그 바탕 위에서 유아교육 기관이 고유의 색깔을 가진 교육을 실현하여 다양성을 제공하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원하는 것이다. 눈처럼 깨끗한 백지 위에 어린아이들이 원하는 그림을 맘껏 그릴 수 있게 해야 한다. 아이들에게 같은 그림, 같은 꿈을 꾸게 하자는 것인가? 정부는 보편적 교육이 무엇인지 곰곰이 생각해 보아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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