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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충정의 신념으로 세계평화와 한반도 통일 기반 조성

커버스토리 장학상 새누리당 중앙위 상임고문/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 총재 | 2016년 01월호 전체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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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학상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 총재는 박정희 대통령의 혁명을 곁에서 도우며 결정적인 공을 쌓은 인물이다. 긴박한 순간, 박정희 소장의 인간됨을 알아보고 혁명의 길을 터준 장본인이 바로 장학상 총재다. 이후 그는 대통령 박정희의 곁을 충실히 지키며 ‘사회기강 확립’, ‘반공’, ‘경제발전’이라는 당대의 비전을 현실화하는데 앞장섰다. 현재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를 이끌며 남북평화통일을 위해 북한인권회복운동을 전개하고 불우이웃돕기 등 사회환원에 앞장서고 있는 그를 만나 지난 소회를 듣고, 현 정권의 비전에 대해 인터뷰했다.

죽음 무릅쓴 혁명 리더와의 첫 대면 
장학상 총재는 일신의 안위보다 조국의 안녕을 먼저 생각했던 공신으로, 박정희 세대의 전형적인 행보를 걸어왔다. 대학생 시절 6·25 전쟁을 겪으며 군인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북한군에 지리멸렬하며 퇴각을 거듭하는 국군을 보며 국가의 존망이 위태로움을 직감해 군에 지원하게 됐다고 전해진다. 당시 헌칠학병 1661으로 소집됐으며 이 가운데 약 20여명이 장교시험에 응시했고, 보병학교 수료 후 학교 성적에 따라 헌병학교 교관으로 임관했다고 전해진다. 이후 결정적인 사건을 통해 장학상 총재는 당시 사단장이었던 박정희 소장과 대면했다. 
“1955년에 5사단 기갑중대에서 근무하고 있었어요. 그때 겨울은 지독한 폭설이 있던 때였죠. 어른 키에 육박할 정도로 쌓인 눈으로 장병 여럿이 죽고, 연대 병력들이 고립되고 말았죠. 저는 기갑차량들을 긴급 동원해 장병들을 구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당시 중대장은 행동을 주저하고 있었어요. 부하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도 본인의 인사상 불이익을 걱정하고 있었죠. 저는 권총을 뽑아 중대장을 위협해 장비들을 동원하도록 했고, 100여명의 장병들을 구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이후 1961년 5월 16일 새벽 3시, 제2군사령부 부사령관이던 박정희 소장은 장면 내각의 무능으로 불거진 사회혼란을 잠재우고 부패에 찌든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거병했다. 소수의 장교계급이 주도한 전형적인 엘리트 혁명이었다.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에 소속돼 있었던 장학상 총재는 이날 주번사관으로 서울 진입로에 설치된 각 헌병 검문소의 바리게이트 개방 권한을 가지고 있었는데, 병력을 끌고 온 박정희 소장을 보며 자신의 운명을 직감하고 휘하 병사에게 검문소 개방 명령을 내리게 된다. 가슴으로 인정한 주군의 밑에서라면 ‘강력한 조국을 만들겠다’는 꿈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장 총재의 판단은 옳았고, 혁명은 성공했다. 하지만 그는 박정희의 곁에 남아 감투를 바라기보다 자신의 소임에 복귀하는 것을 택했다. 혁명 성공의 기쁨이 식기도 전에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 겸 수도방위사령부 제52중대장(서울지구)으로 활동하게 된 것이다.
혁명 정부는 서서히 영웅들의 시대를 향해 나아갔다. 장 총재는 반동의 수뇌였던 장모 장군 구인 임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함으로써, 반혁명을 미연에 방지했다. 또 1963년 3월 15일에는 휘하 장교 62명을 인솔해 ‘박정희 의장 민선대통령 출마 지지 및 박 국방장관 해임 촉구 데모’를 주동했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정치적인 활동을 했다는 이유로 장 총재는 결국 제2군사령부로 보직을 옮기게 됐다고 한다. 
“사리사욕을 위한 행동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혼란을 잠재우고 자유민주주의를 지켜낼 분은 박정희 대통령님이 유일했고, 전 그 사실을 큰 목소리로 외쳤을 뿐이었죠.”
그리고 제 2군사령부에서 조용히 임무에 집중하던 장학상 총재를 박정희 대통령이 찾았고, 이후 장 총재는 청와대 경호관으로 본격적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젊음과 패기를 조국에 바치다
이후 장학상 총재는 박정희 대통령을 도와 사회 분위기를 단속하고 새마을운동을 야전에서 지휘해 큰 성과를 거둔 바 있다.
“전쟁 직후 폐허가 되다시피 붕괴해버린 남한의 SOC는 외국의 도움 없이 일으킬 수 없는 상황이었어요. 박정희 대통령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일국교 정상화라는 카드를 꺼냈죠. 당연히 당시 한국 분위기는 일본에 대해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지지 않았던 때여서 민심이 술렁이기 시작했어요. 기어코 전교 대학생 수십만 명이 한일협정 반대 시위를 벌였죠. 저는 신속하게 대응해 시위를 진압하는 한편, 학생회장들과 담판을 지었죠. 
장학상 총재의 다각도에 걸친 노력 덕분에 다행스럽게도 한일국교 정상화 반대시위는 누그려졌다. 이 밖에 그는 마약범죄 단속, 산림녹화운동 지휘로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능력을 인정받았다.
“저는 무엇보다 자동차 국산화를 큰 성과로 꼽습니다. 때는 70년대, 대한민국이 국산차 개발에 여념이 없을 시기에 신진자동차가 GM과 합작해 창립한 GM코리아에 제가 근무하고 있었어요. 물론 한국에는 차체 프레임을 설계할 능력이 부족했죠. 이 상황에서 자동차 설계 및 생산 기술을 국산화하기 위해서는 벤치마킹이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고, GM社 차량의 각종 프레임 모델의 국내 조기 생산을 추진함으로써 자동차 기술의 국산화 시기를 앞당겼어요. 이제는 대한민국이 어엿한 자동차 제조 강국으로 인정받고 있는 것이 아주 뿌듯합니다.”

항상 변치 않는 봉사 철학
장 총재는 수십 년 간 불우아동돕기 성금을 지원해왔고 청도새마을사업비 예산(상하수도, 도로포장비, 환경비 등)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전국 7개 학교에 이순신 장군 동상 건립에 사재를 털었다. 이밖에 6·25전쟁의 영웅들을 추모하는 활동에도 충실했다. 국가보훈처의 협의와 학병동지의 성금으로 1,661명 학도병 참전기념비 건립을 성공적으로 추진한 바 있다. 6·25전쟁의 극복과 승리의 결과는 국민총단결 항쟁은 물론 최후방어선을 대구중심으로 극복한 것이 큰 관건이었다. 당시 전 장관이었던 조병옥 박사의 사수지휘성과로 국정개발국민회의 김용성 대표의장과 장학상 부의장이 그림액자모금으로 서울어린이대공원에 조병옥 박사 동상을 건립하여 매년 참배 중에 있다. 현재 그는 (주)대원산업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으며, 세계평화실천운동본부 총재로서 세계평화와 한반도 통일을 이룩하기 위해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또한 그는 대한민국에 뚜렷한 공로를 세운 자에게 수여하는 무공훈장을 수상한 바 있다.

“박 대통령, 아버지 닮아 성정이 곧고 철두철미해”
장학상 총재는 박근혜 대통령의 현재 모습에서 박정희 대통령의 모습을 발견하곤 한다. 4대악을 일소하는데 주력하는 한편, 당당한 외교력으로 통일 시대를 열어가는 행보가 영락없는 박정희 소장과 닮았다는 것이다.
“아주 순수하고 공명정대하게 국정을 이끌어가고 계십니다. 제가 목숨을 맡겼던 박정희 대통령님과 닮았어요. 올바르고 정확하게 국가를 다스리고 사회를 좀먹던 부패를 일소하기 위해 갖은 애를 쓰고 계시니, 그 분의 아버지를 모셨던 입장에서 아주 기쁘고 벅찬 감동을 느낍니다. 남은 임기동안 대한민국에 원칙과 정의을 세워주시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장학상 총재는 애국심과 충성심을 잃지 않고, 역사와 후배 앞에서 당당한 모습이었다. 비록 육신은 쇄했을 지라도, 과거의 영광과 뜨거웠던 가슴을 기억하는 그의 눈매는 여전히 미래를 바라보며 빛나고 있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모든 것을 걸고 조국을 위해 투신했던 장학상 총재. 그가 쌓아온 역사는 앞으로 통일 한국을 맞이할 젊은 세대들에게 필요한 삶의 철학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준다. 정혜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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