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전 네팔 히말라야산맥 칸쳉충가. 촬영을 어렵게 마치고 봉우리를 내려오는 조진수 사진작가의 두 뺨에 눈물이 타고 흘렀다. 좋은 작품을 만들었다는 보람 때문인지, 인생에서 다시 못 볼 경치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뜨거운 것이 차올라 눈물로 흘려보냈다고 한다. 조진수 작가는 세상에서 네팔을 가장 잘 아는 남자다.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매년 네팔 곳곳을 방문하며 히말라야의 얼굴을 화각에 담았다. 그래서 그의 사진에는 산과 사람 그리고 히말라야 신의 흔적이 깃들어 있다는 평가다. 칸쳉충가에서의 조진수 작가의 눈물은 히말라야의 신이 그를 품었기 때문이 아닐까.
조진수 작가는 1993년부터 지금까지 매년 네팔 전역을 돌며 사진을 찍어왔다. 특히 최근 몇 년간 방문했던 네팔 서부는 네팔에서도 오지중의 오지로 손꼽힌다. 2010년이 되면서 찻길이 조금씩 생기기 시작했으며 관광객이나 트레커가 없는 것은 물론, 암벽등반 장비가 있어야만 통과할 수 있는 곳이 부지기수다. 오히려 이런 이유로 그는 원초적인 네팔 서부의 자연과 때 묻지 않은 현지인들의 모습을 사진에 생생하게 담아낼 수 있었다고 한다. 어떨 때는 식량이 모자라 더 이상 갈 수도, 되돌아 올 수도 없는 상황에 빠진 적이 있었고, 어떨 때는 마을이 생긴 이래 처음 외국인이 방문했다며 현지인들이 잔치를 열어주기도 했단다. 눈이라도 크게 내리면 죽을 수도 있는 상황에서 신이 도와주셔서 무사히 돌아왔다는 조 작가의 무용담을 들으며 기자는 상상만으로도 모골이 송연해졌다. 그는 왜 20년이 넘는 시간동안 네팔만을 고집한 것일까.
“히말라야는 장엄하고 아름다우며 신비롭습니다. 사람들은 순박하고 소박하며 정겹기 짝이 없습니다. 저는 네팔의 신령함에 이끌려 히말라야의 얼굴만 촬영해 왔는데요. 대충 몇 컷 찍기 위해서가 아니라, 제대로 히말라야를 담기 위해 오랜 세월 네팔에서 목숨을 걸고 만년설 골짜기를 타고 넘었던 것입니다.” 조 작가는 고산과 거기에 기대어 살아가는 사람들을 영상에 담으며 더없이 행복했다고 한다. 연출 없이 태고의 신비와 사람들을 그대로 담는 사진, 신의 흔적을 꾸밈없이 화각에 담기 위한 조 작가의 노력이 사진 속에 그대로 묻어있다. “산은 제 스승입니다. 목숨을 걸고 히말라야를 오른 뒤 한국에 돌아와서 ‘이제 살면서 힘들다는 말은 더 이상 쓰지 말자’고 맹세했습니다. 추위, 지형과 싸우며 젖 먹던 힘까지 다 짜내야 찍을 수 있는 사진을 손에 쥐고 더 이상의 어려움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자연은 어김없이 약속을 지킨다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해가 뜨고 지는 자연은 약속의 중요성을 일깨워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물과 식량의 소중함, 이는 생존을 위한 자연의 선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이 세 가지는 어디서도 체득 할 수 없는 히말라야의 가르침입니다.” 한국네팔국제교류회(한네연)는 네팔에서 봉사활동을 하는 김포의 뜻있는 사람들이 만난 단체다. 조진수 작가는 한네연 회원으로 그동안 네팔 오지에 보건소, 유치원 등을 지었다. 또 학교 비품과 시설물은 물론 한 마을에 염소 200마리를 기증해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최근 네팔지진이 나자 한네연은 대형텐트 20동과 침낭100개를 긴급 지원하고, 학교를 지어 임시대피소로 사용하기 위해 학교 건축에 착수할 예정이다. 사실 6월 중순 김포 시민들과 사진인들의 큰 관심 속에 네팔 지진돕기를 위한 조진수 작가의 사진전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중동호흡기증후군의 확산에 대해 시민들의 건강을 염려한 조 작가의 결단으로 행사는 연기되었다. 하지만 조 작가는 씩 웃었다. 더 나은 결과를 위한 신의 배려가 아니겠냐는 것. 호손의 소설에서 ‘큰 바위 얼굴’을 동경하며 삶의 의미와 관대함을 배워간 어니스트처럼 그도 히말라야의 얼굴과 닮아있었다. 산은 사람을 변화시키고, 그 사람은 새로운 역사를 만들었다. 네팔 현지 상황이 극도로 안 좋지만 조 작가는 올해도 네팔에 갈 계획이다. 네팔에서 진행되고 있는 학교 건축을 확인하고 가네쉬히말 지역을 촬영할 계획이라고 한다. 이번 트래킹에서 조 작가는 또 얼마나 산을 배워올까. 그의 사진을 통해 어림 짐작해볼 뿐이다. 이양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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