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을 위한 관상학 전문서 ‘초보자를 위한 관상학’과 ‘신기원의 꼴 관상학’은 만화 ‘허영만의 꼴’ 감수자이자 작중인물인 관상가 신기원의 저서다. 명리학자 조용헌은 ‘우리시대 대표 관상가’로 그를 뽑았을 정도다. 저자는 지난 50년을 관상가로 활동하며, 당대 최고의 관상가로 통한다. 사실 ‘초보자를 위한 관상학’과 ‘신기원의 꼴 관상학’을 정독한다 해도 ‘관상학’이라는 거대한 학문의 특성상 오묘하고 아득한 본질은 더욱 요원하게만 느껴진다. 하물며 관상에 문외한인 일반인들 입장에서 관상학은 더욱 받아드리기 힘든 학문이다. 공부해보지 않은 이들에게 관상학이란 미지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관상학이 널리 알려진 오늘날도 점학과 동일시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다.
저자는 한의사였던 선친의 가업을 이어받기 위해 열서너 살부터 한의학과 동양철학을 공부했는데, 환자들의 체질을 공부하기 위해 상학을 접하면서부터 저자의 운명은 다른 방향으로 접어들었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전국을 유랑하며,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얼굴들 하나하나를 스승으로 삼아 젊은 날을 보냈다. 참으로 오랜 세월 험난한 가시밭길을 걸어온 40여 년 만에, 이 책을 필두로 한 관상 시리즈로 마침 내림굿을 받듯이 그 고통을 풀어낼 수 있게 되었으니 어찌보면 너무나 박복하다 하겠다. 왜냐하면 지난 10년 동안 이끌어 주는 스승 없이 홀로 연마해왔으니 그 얼마나 고단한 삶이었겠는가. 그러한 점에서 현대의 독자들과 상학을 연구하려는 이들은 행복한 셈이다. 쉽고 재미있게 다루어져 있는 책으로 기초를 닦은 다음, 얼마든지 나름대로 심화시켜 나갈 수 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몇 자의 한문으로 던져진 문구를 실제의 삶 속에서 적용, 심화시키며 자신의 것으로 무궁무진하게 발전시켜 나가야 했던 저자의 작업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테니 말이다.
인체에 깃든 자연의 원리를 관찰한다 인간은 자연의 영기를 받고 태어난 존재로서, 자연의 모습과 이치를 그대로 빼어 닮은 축소판이다. 인간을 ‘만물의 영장’이라고 보는 까닭도, 인간이 자연 속에 깃든 신령스러운 기운을 받아 그 어떤 생명체보다 특출한 정신력과 조화로운 육체를 갖추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인간의 삶은 자연의 이치와 일치되게 사는 것이 가장 이상적인 것이며, 상의 조건 역시 자연의 원리에 부합되면 좋은 상이고 그렇지 못하면 악상이 된다. 상법이란 이와 같은 자연의 조화를 인간의 육체에 적용시켜 파악한 이치이다. 곧 인체라는 ‘소우주’에 깃들어 있는 대우주의 원리에 합하는 삶의 길을 열어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대우주인 자연과 소우주인 인간이 어떻게 합치되는 것일까. 자연 속에는 태양이 있고, 달과 별이 있고, 산이 있고, 바다와 강이 있고, 육지가 있다. 또 그 육지에는 가지각색의 만물이 존재한다. 우리의 인체에도 이와 같은 천지만상이 그대로 존재한다. 즉 머리는 하늘을 상징하고 발은 땅을 상징하니, 머리는 하늘처럼 높고 둥글어야 하며 발은 땅처럼 모가 나고 두터워야 하다. 양쪽 눈은 태양과 달에 해당하니, 눈빛은 해와 달처럼 맑고 빛나야 한다. 음성은 우레를 상징하니 울려야 하고, 혈맥은 강과 하천을 상징하므로 윤택해야 한다. 뼈는 금석이니 단단해야 하고, 살은 곧 흙이므로 풍요로워야 한다. 입은 바다요 인중은 강이며, 얼굴의 편편한 곳은 들이다. 코와 관골과 이마와 턱은 산악을 상징하므로 적당히 솟아야 하고, 머리카락과 수염 등 인체의 모든 털은 나무와 풀을 상징하므로 맑고 수려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에 다음과 같은 변화가 일어난다고 가정해보라. 하늘은 낮고 땅은 얄팍하며 해와 달이 밝지 못하다면, 또한 강과 하천에 물이 부족하여 윤택하지 못하고 금석이 가볍고 무르며 산이 평평하다면, 그리고 풀과 나무와 곡식들이 너무 빽빽하거나 듬성듬성하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참으로 암담함 삶이 펼쳐질 것이다. 이처럼 관상학은 만상의 이치를 상에 부합시켜 해석하는 학문이다. 곧 인체에 깃들어 있는 우주자연의 원리를 관찰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을 살피고, 자연의 원리에 부합하는 삶의 길을 열어가도록 돕는다.
우리의 얼굴, 정확하게 보자 얼굴에는 삶 전체가 담겨 있다. 그래서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마음을 쓰며’ 살아가는 존재요, ‘생각을 하며’ 행동하는 존재이다. 아무리 감추고자 하여도 사람에게는 누구나 타고난 천성이 있게 마련이며, 이러한 자신의 마음과 생각, 그리고 지금까지 살아온 삶의 모습들이 얼굴을 통해 드러나기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얼굴을 통해 그 사람을 ‘읽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실 어떤 사람을 바로 앞에 놓고 그의 됨됨이를 파악하기란 참으로 힘든 일이다. 누구에게나 사람의 얼굴에 대한 나름대로의 느낌과 판단이 있지만, 그것은 자신과의 관계에 따라 왜곡될 수도 있고, 다분히 감상적인 것으로 흐르기도 한다. 이러한 모든 개인적이고 주관적인 측면을 떠나, 한 인간의 총체적인 삶이 집약되어 있는 상을 가장 객관적이고 과학적으로 분석 연구하는 학문이 바로 관상학이다. 관상학은 모든 천하만사에 임하여 안목을 키우는 순도 높은 실체수련학(實體修鍊學)이라 할 수 있으니 관상학은 바로 우리의 인생에 있어 실용 철학이요, 실천 철학이다. 그리하여 관상학의 연마는 진솔한 인생관과 진실한 삶의 지혜를 다듬어 나갈 수 있는 처세의 선치학(善治學)이라 할 수 있다. 본래 관상학 연마의 목적은 성명쌍수(性命雙修)에 있으니 자기의 타고난 성정과 명(命)을 갈고 닦아 선천의 유전과 후천의 수지(修持)로 화변(化變)시키는 데 있는 것이다. 노자는 “화복(禍福)은 무문(無門)이요, 유인자초(唯人自招)”라고 했으니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 자기에게 달렸다는 것이다. ‘대학’에서도 “덕윤신(德潤身)이요, 심광체반(心廣體胖)이라”하였으니 얼마든지 자기의 후천적 노력에 의해서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관상학은 비소도지학문(非小道之學問)이니 입신공명이나 길흉화복을 점치는 방술로만 인식될 것이 아니라 크게는 정치관계에서 작게는 인생의 윤상처세(倫常處世), 용인택교(用人擇交)로 활용될 수 있다.
관상학은 21세기를 위한 학문이다 초보자들이 관상학을 공부할 때 하는 가장 큰 실수는 ‘어느 부위가 이렇게 생기면 이러저러한 운명을 맞게 된다’는 식의 일방적인 주입이다. 왜 그렇게 되는지에 대한 원리를 이해하지 못한 채 결과만을 암기할 경우, 단 한 명도 같은 얼굴이 없는 오묘한 인간의 얼굴을 기계적으로 공식에 대입함으로써 자칫 판단의 오류를 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관상학은 원문(原文)을 보면서 원리를 터득해야 깊은 경지까지 도달할 수 있다. 호방하면서도 섬세하고 날카로운 원리 추구가 가장 필요한 것이다. 현대는 인터넷이 지배하는 사이버시대로, 이제 개개인의 직접적인 대면보다는 모니터를 통해 서로를 접하는 시대로 바뀌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근본적으로 함께 부대끼고 삶을 호흡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배우고 이해하게 마련이다. 하지만 싸늘한 모니터를 통해 교류하는 현대인들은 서로의 기운을 느낄 수 없게 되고, 점차 인간에 대한 직관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확신한다. 이러한 시대일수록 인간이 더욱 소중하고, 작고 따스한 것들이 눈물겹게 그리워지게 되리라는 것을. 우리의 운명을 좌우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지, 기계나 문명이 아니기 때문이다. 지난 세기든 앞으로의 세기든, 우리의 화두는 인간이며, 인간적인 삶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학문이 미래를 선도하게 될 것이다. 저자는 관상학이 올바르게 활용될 수만 있다면, 인간을 위한 학문이 될 수 있음을 강조했다. 이양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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