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목공예와 자수공예의 대가 영보공예 추송 이병연 명인(명인 제13-1123-22호)은 그동안 전통 가구에 자수를 놓으며 서로 다른 분야의 전통 공예를 새로운 예술 세계로 지평을 넓혔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국내 대표적인 공예 장인이다. 1960년대 전통 공예에 입문한 선생은 고 백태원 선생에게 사사 받아 나전칠기를 배웠다. 그후 공예 디자인을 시작한 뒤 목공예와 자수 공예를 결합해 이를 대중화하는 데 큰 역할을 하며 <대중화>의 길을 개척해 왔다.
품위 있으며 아름다움까지 갖춘 작품들 “작품 제작에 있어 무엇보다 실용성을 중요시합니다. 동시에 기능성, 인테리어 효과를 생각합니다. 우리의 작품이 각자의 용도에 맞게 사용되면서 우리의 전통 문화도 함께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작품은 실용성과 쓸모가 있고, 다른 것과 잘 울리는 조화로움이 있어야 하지요.” 영보공예는 장롱이나 안방가구 등 전통가구에 자수를 수놓은 작품을 만들어 왔다. 제작 전 과정에 참여하는 이병연 선생은 우리 전통의 미를 생활 속에 구현해 놓았다. 우리 생활 속의 가구나 소품 등이 예술 작품이 되도록 혼을 불어 넣는 작업을 해 온 것. 그의 손길을 거치면 가구는 가구 이상의 가치로 변모한다. 용도에 맞되 품위가 있으며 아름다움까지 갖춘 그의 공예 작품들은 예술과 함께 숨 쉬는 공간을 만들어 낸다. 이병연 선생은 언제나 전통의 맥을 잇되 그 시대에 맞게 기능, 모양 등을 고려한다. 이에 따라 작품의 종류마다 차이는 있지만 제작하는 작품은 보통 6개월 이상의 제작기간이 소요된다. 도안부터 목공 등 모든 작업을 세심하게 수작업으로 진행하기 때문이다. 영보공예 작품은 그동안 방송 관계자들에 의해 많이 소개돼 왔다. 20여 편의 인기 드라마와 영화에도 소품으로 설정되어 나오며 TV, 영화에서는 거의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드라마 ‘해를 품은 달’, ‘왕의 여자’, ‘황진이’, ‘장밋빛 연인들’, ‘욕망의 불꽃’ 등 다수의 인기작을 통해서도 작품을 선보였으며 ‘사임당’, ‘홍길동’에도 협찬했다. 영보공예는 MBC 우수협찬사 우수상을 수상한 바 있다. 또한 이병연 선생의 작품은 2013년에는 KDB산업은행이 주최한 국내 최고 권위의 전국공예산업대전에서 동상을 수상하며 호평을 받았다.
전통은 진화해 가는 것 “내게 공예는 인생입니다. 삶에 있어 모든 생각과 사고, 행동이 작품으로 귀결됩니다. 작품에 사용하는 나무도 품질 좋고 고급스러운 자재를 선별해 사용합니다. 여기에 까다로운 동양의 자수를 결합시킴으로써 더욱 아름답고 완성도 높은 표현을 할 수 있습니다.” 지난 2015년은 그가 공예에 입문한 지 50년이 되는 해였다. 50여년의 세월 속에서도 그는 초심을 잊지 않으며 그 많은 세월을 차곡차곡 쌓아온 것이다. 최근에는 국내를 넘어 일본과 중국 등 해외에서도 작품 구입을 의뢰하는 사례가 많다. 앞으로는 주로 선보였던 크기가 큰 가구보다, 대중적인 작은 소품이나 작품을 많이 선보일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병연 선생은 전통은 언제나 새로운 창조에 의해 계승되고 발전되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21세기인 지금 시대의 주거형태 가옥에 맞춰 밝은 톤을 반영하고 실용색상의 미적인 감각을 십분 살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목공예품은 기본적으로 생활용품이기 때문에 예술성 못지않게 일상생활에서도 편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실용성을 갖춰야 합니다. 전통은 고정불변이 아니라 항상 현재와 호흡하며 진화해가는 속성을 지니고 있지요.” 이어 이병연 선생은 작품 제작에만 몰입했던 이전의 열정을 오랜 세월 속에 새로이 추스르고 있다고 했다. “언제나 배우고, 비우며 즐거운 마음으로 작업합니다. 때로 영감을 얻기 위해 쉬어가기도 하고,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갑니다.” 이병연 선생은 또한 우리민족 문화의 우수성에 대해 자긍심을 가져야한다고 강조했다. “우리는 이미 경제부국의 대열에 섰으나 우리문화의 우수함에 대해 스스로 잘 모릅니다. 우리에게는 세계 선진 문화의 대열에 설 때에도 전혀 손색이 없는 문화유산이 많습니다. 문화강국의 자긍심을 가지고 우리의 우수함을 세계에 당당히 선 보이고 자랑해야 합니다. 앞으로 세계에 우리문화의 아름다움을 전하는데 노력하며 힘을 보태고 싶습니다.” 정재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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