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새해 벽두부터 그 어려운 일을 혈기왕성한 대한민국 20대 청년이 해냈다. 한국 테니스의 간판으로 성장한 정현은 호주 멜버른 파크 로드 레이버 아레나에서 열린 ‘2018 호주 오픈 테니스 대회(총상금 5천 500만 호주달러 약 463억 원)’에서 4강 신화를 썼다. 그는 이 대회에서 알렉산더 즈베레프, 노박 조코비치 등 현 테니스계를 호령하는 거물을 차례로 제압하고 ‘황제’ 로저 페더러와의 대결까지 성사시켰다. 비록 4강전에서 발바닥 부상으로 기권을 선언하며 결승전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4강전에 이르기까지 그가 만들어낸 감동의 드라마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는 평이다.
정현은 시즌 첫 그랜드슬램 대회인 호주 오픈 16강에서 자신의 우상이자 메이저 대회 12회 우승에 빛나는 노박 조코비치에게 승리하는 이변을 일으켰다. 노박 조코비치를 꺾고 8강에 오른 직후 그는 ‘보고 있나?’라는 글자를 카메라 렌즈에 쓰며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부상에서 돌아와 복귀전을 치른 개념인 노박 조코비치를 이겼을 때는 실력도 실력이지만 천운이 따른 결과라며 이 기념비적인 승리를 폄하하는 이들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8강전에서 샌드그렌을 3-0으로 완벽하게 꺾은 후 정현의 승리가 단순 운이 아니라는 것이 여실히 입증되었다. 이처럼 정현의 그랜드슬램 대회 4강 신화는 그 자체로 대단한 업적이다. 아시아 선수로서는 무려 86년 만에 이 대회 남자단식 4강에 오른 것이기도 하고, 지난 10년간 세계 남자 테니스계 빅4(페더러, 라파엘 나달, 조코비치, 앤디 머리)로 군림하던 견고한 성벽에 균열을 일으킨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지난 10년 동안에는 빅4의 경이적인 활약으로 인해 그랜드슬램 4강 진출을 빅4를 제외한 선수가 해내기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웠다. 25세 미만의 젊은 선수가 이 기간 동안 그랜드슬램 대회에서 4강에 오른 적은 고작 3번에 불과할 정도다. 이에 우리나라에서는 그야말로 정현 신드롬이 강하게 일고 있다. SNS를 비롯한 온라인상에서 ‘정현’이라는 검색어는 순위권에서 내려올 줄을 모르며, 온라인 쇼핑몰을 중심으로 최근 2주 사이 테니스 용품 판매가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무려 350% 이상 증가했다. 만나는 사람들마다 꺼내는 이야기는 온통 정현에 관한 이슈고,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연일 매스컴을 집어삼키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해외에서의 찬사는 더한 상태다. 미국 스포츠 매체 ESPN은 ‘정현이 역사를 새로 썼다(Chung makes history)’라는 헤드라인을 뽑았으며, “정현이 세계 4위 알렉산더 즈베레프와 조코비치를 차례로 격파하고 4강에 올랐다”며 그의 실력에 경이를 표했다. 또한 AP통신은 즈베레프와 조코비치를 물리친 정현을 가리켜 ‘거물 사냥꾼(Giant killer)’이라 칭했고, 테니스 선수로는 드물게 안경을 쓰고 경기를 하는 외형적인 면을 부각시켜 ‘교수(The professor)’라는 닉네임을 붙이기도 했다. 그와 경기를 마친 페더러 역시 “정현이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실력은 TOP10에 들 자격이 충분했다. 그는 반드시 훌륭한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고 코멘트 했다. 그는 지난 1월 28일 각본 없는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고 인천국제공항을 통해 귀국했다. 말 그대로 ‘금의환향’이었다. 인천국제공항 출국장은 한국은 물론 아시아 테니스의 역사를 새로 쓴 정현을 보기 위해 몰려든 시민과 취재진으로 장사진을 이뤘다. 1층은 물론이고 2층까지 가득 메운 인파는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 정현에게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귀국 선물로 전했다. 이에 정현은 “많이 와주실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일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환대를 받으니 비로소 내가 정말 큰일을 해냈다는 것이 실감난다”고 소감을 밝혔다. 그는 이어 “‘나도 할 수 있다’라는 생각은 평소에 항상 하던 생각이었지만 그날이 이렇게 빨리 올 줄은 미처 몰랐다”며 “한국뿐만 아니라 아시아 테니스 전체가 ‘할 수 있다’는 것을 나의 플레이를 통해 충분히 보여준 것 같아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덧붙였다.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정현의 세계랭킹은 58위에서 29위로 수직상승했다. 종전 이형택의 최고 기록인 36위를 넘어 한국 테니스 사상 최고 순위에 당당히 이름 석자를 올려놨다. 그의 4강 신화가 그저 4강 신화로 머물지 않고 테니스 불모지였던 한국에 테니스 붐을 가져오기를 정현 스스로도 꿈꾸고 있었다. 정현은 “2주간 정말 과분할 정도로 많은 관심과 성원을 보내주셔서 대단히 감사하다”면서 “이번 열기가 한국 내 비인기 종목으로 꼽히는 테니스의 인기 상승으로 이어졌으면 한다. 한국 테니스를 위해 앞으로도 많은 응원을 부탁드린다”고 바람을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정현은 최선을 다했고 한국 국민들은 그의 활약을 바라보며 많은 행복감을 느꼈다. 혹자는 정현의 이번 활약을 2002년 한·일 월드컵 4강 신화와 비교하기도 한다. 그만큼 국민들의 가슴을 뜨겁고 뭉클하게 적셔놓았다는 방증일 것이다. 스포츠 영웅의 등장은 언제나 반갑다. 국가적으로 힘든 상황에 직면할 때면 늘 스포츠 영웅이 등장해 ‘할 수 있다’는 새로운 희망을 국민에게 안겨주었기 때문이다. 정현의 등장 역시 마찬가지다. 경제 불황, 북한 핵도발 등 나라 안팎으로 여러 문제가 산재한 우리나라의 현 상황 속에서 정현의 4강 신화는 국민들에게 다시금 삶의 활력을 주기에 충분했다. 우리는 ‘정현’이라는 한 겨울날의 달콤한 꿈을 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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