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극단의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 시리즈 아홉 번째 작품으로 윤백남 작, 김낙형 연출의 <운명>이 무대에 오른다. 지난 2014년부터 이어져오는 근현대 희곡의 재발견은 한국 연극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 근현대 희곡을 현대 관객들에게 소개하는 기획 시리즈다. 그간 <국물 있사옵니다>, <산허구리>, <가족> 등 현대 관객들이 접하기 어려웠던 우리 희곡을 무대화했으며, 2018년에는 시리즈의 일환으로 <운명>을 공연한다. <운명>은 이화학당 출신의 신여성이 하와이에 살고 있는 남자와 ‘사진결혼’을 하게 되면서 벌어지는 일들을 그렸다. 1920년대 쓰이고 1921년 처음 공연된 이 작품은 1920년대 흔히 있었던 하와이 사진결혼의 폐해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는 평이며, 작품 전반에서 일제강점기 한국인들의 삶과 애환을 엿볼 수 있다. 이화학당 출신의 박메리는 아버지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양길삼의 사진만 보고 하와이로 건너간다. 기대와 다른 결혼생활 때문에 매일을 눈물로 지내던 박메리는 잠시 하와이에 들른 옛 애인 이수옥을 만나게 된다. 박메리에게 흑심을 품고 있던 이웃 남자 장한구는 메리의 남편 양길삼에게 둘의 만남을 알린다. 조선인들의 경제 상황이 극도로 악화되었던 일제강점기, 일제의 지배에서 벗어나 새로운 삶의 기회를 얻고자 했던 수많은 조선인들이 노동력 확보에 열을 올리고 있던 하와이로 이주했다. 남성들에 비해 초기 이주 비율이 낮았던 여성들 역시 이후 사진결혼을 통해 하와이로 건너가는 일이 많아졌고 1910년부터 1924년까지 무려 700명에 달하는 여성들이 사진결혼을 이유로 이주했다. <운명>은 이러한 사진결혼의 문제점을 꼬집으면서 일제강점기 조선인들의 비극을 담아낸 작품이다. 사진결혼의 중매자에 의하면 주인공 박메리가 결혼하게 될 남자는 훌륭한 인격과 부를 지닌 사람이었지만 하와이에 도착해 마주한 남편은 구두 수선공에 도박과 음주를 즐기며 술주정을 일삼는 사람이었다. 실제로 당시 하와이의 척박한 노동환경을 견디기 힘들었던 조선인들의 탈선이 있었고, 사진결혼을 통해 하와이로 건너간 여성들도 기대와 다르게 불행한 결혼생활을 보내야 했다. 이외에도 <운명>에서 섬세한 대사를 통해 그려지는 이주민 부부의 갈등은 당대 조선인들의 이주 과정과 종교 생활 등 다양한 삶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또한 이번 공연은 ‘사진 신부’들의 실제 목소리를 담은 영상을 활용하는 등 낯선 이국땅에서 시대의 비극적 운명을 마주해야 했던 이들의 이야기를 보다 생생하게 현대 무대로 옮겨온다. <운명>은 오는 9월 7일부터 29일까지 백성희장민호극장에서 공연되며, 티켓 가격은 전석 3만원이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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