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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1월 5일, 김창열 화백이 숙환으로 별세했다. 향년 92세에 세상을 떠난 김창열 화백은 영롱하게 빛나는 물방울과 동양의 철학과 정신을 상징하는 천자문을 캔버스에 섬세하게 쓰고 그리며, 회화의 본질을 독창적으로 사유한 한국 현대미술의 거장이다. 김창열은 1929년 평안남도 맹산에서 출생했다. 그는 명필가였던 조부에게 천자문과 서예를 배웠고, 훗날 <회귀> 연작을 통해 그러한 기억을 작품에 녹여냈다. 1946년, 서울로 내려와 먼저 월남한 아버지를 만날 때까지 일 년간 서울의 월남민 피난 수용소에서 지냈다. 이듬해, 사설 미술학원인 경성미술연구소에 등록하고, 이어 서양화가 이쾌대가 운영하는 성북회화연구소에 들어가 본격적으로 그림을 배우기 시작했다. 휴전 후 서양화가 이상복의 화실에서 조수로 일하던 그는 또래 작가들을 만나 어울렸고, 김영환, 이철, 김종휘, 장성순, 김청관, 문우식, 하인두와 함께 1957년 ‘한국현대미술가협회(현대미협)’를 창립해 동인전을 개최하며 새로운 미술 운동을 시작했다. 기존 화단 질서에 반기를 든 젊은 작가들은 ‘현대미협’을 통해 당대 전위 미술의 주요 경향인 앵포르멜의 흐름을 주도했다. 1950년대 김창열도 물감의 흔적과 캔버스 표면의 질감, 붓을 휘두른 작가의 몸짓을 강조하며 전쟁이 남긴 트라우마를 담은 앵포르멜 계열의 추상 연작 <상흔>과 <제사> 등을 제작했다. 김창열은 1961년 현대미술가협회와 60년 미술가협회가 경복궁미술관에서 연합전을 열고 통합 결성한 ‘악뛰엘’에서도 창립 멤버이자 그룹의 주축으로 왕성한 활동을 펼쳤다. 신문과 여러 매체를 통해 시나 에세이를 발표한 문필가였던 그는 한국 현대미술사의 변화를 상징하는 텍스트인 악뛰엘의 선언문도 직접 작성했다. 이 선언문에서 그는 “해진 존엄들 여기 도열한다. 그리하여 이 검은 공간 속에 서로 부둥켜안고 홍조한다”고 쓰면서 새로운 미술을 향한 열정과 그 도래를 천명했다. 김창열은 1961년 ‘제2회 파리비엔날레’에 참여하며 국제무대에 처음 작품을 소개하고, 1963년 서울의 프레스센터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65년부터 4년간 미국 뉴욕에 머물며 록펠러재단의 장학금으로 아트스튜던트리그에서 판화를 전공한 그는 첨단의 미술 환경에 적응하며 작품 제작을 이어갔다. 팝아트, 미니멀리즘 등 당대 미국 주류 화단 흐름에 영감을 받은 기계적이고 추상적인 형태가 반복되며 리드미컬하게 배열된 <구성> 연작을 그리며 변화를 모색했다. 백남준의 도움으로 1969년 ‘제7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 참가한 그는 미국 생활을 청산하고, 좀 더 다양한 미술 경향이 공존하는 파리로 돌아갔다. 작가는 1970년 파리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팔레조의 낡은 마구간에 아틀리에와 숙소를 마련했다. 작업실에 머물며 작품에 정진하던 중 아내 마르틴 질롱 여사를 만났다.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도 어렵게 생활하던 시절, 작가는 캔버스를 재활용하기 위해 뒷면에 물을 뿌려 물감이 떨어지기 쉽게 했다. 이 과정에서 화폭에 맺혀 아침 햇살을 받으며 영롱한 빛을 발하는 ‘물방울’의 아름다움을 발견하고, 이를 작품의 주요 모티프로 삼기 시작했다. 김창열은 이후 50년 넘게 물방울이라는 소재에 천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물방울 회화를 창조했다. 프랑스에서 먼저 이름을 알린 그는 1976년 갤러리현대 개인전을 통해 한국에 처음 물방울 회화를 선보였고, 미술계 안팎으로 신선한 반향을 일으키며 작가의 인지도도 크게 올랐다. 초기 물방울 회화에서 물방울은 전쟁으로 인한 작가의 상실감과 정신적 고통을 극복하는 정화와 치유의 수단이었다. 1980년대 들어, 작가는 캔버스가 아닌 거친 마대를 사용해 표면의 즉물성을 강조하고 물방울을 극사실적으로 묘사했다. 날것의 바탕과 그려진 물방울의 이질감을 강조하며 실제 물방울의 물질성은 사라지는 효과를 얻었다. 1980년대 중반 이후, 마대 자체를 여백으로 남긴 이전 작품과 달리 한자의 획이나 색점, 색면 등을 연상시키는 <해체> 연작을 통해 보다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동양의 정서를 끌어들였다. 1980년대 후반부터 한자를 물방울 회화에 도입한 <회귀> 연작을 본격적으로 그리면서, 천자문과 도덕경을 통해 동양 철학의 핵심적 사상을 담아내려는 의지를 더욱 강조했다. <회귀> 연작에서 작가는 먹으로 한지에 문자를 겹쳐 빼곡하게 쓰거나 캔버스에 인쇄체로 또박또박 천자문을 쓰고, 그것을 배경으로 투명한 물방울이 무리지어 있도록 화면에 그렸다. 천자문과 도덕경 등의 글자들은 화면에 구성적인 요체로 자리 잡아 이제는 잊힌 역사적 흔적과 같은 역할을 하는데, 이는 현실의 물방울과 어우러져 시공을 초월한 조화로움을 드러냈다. 1990년대 작가는 돌과 유리, 모래, 무쇠, 나무, 물 등을 재료로 물방울 회화를 설치미술로 확장했다. 2000년대 들어서는 노랑, 파랑, 빨강 등 캔버스에 다양한 색상을 도입하며 또 다른 도약을 시도했다. 생전 김창열은 국립현대미술관, 선재현대미술관, 드라기낭미술관, 쥬드폼므미술관, 중국국가박물관, 부산시립미술관, 국립대만미술관, 광주시립미술관 등 국내외 주요 미술관과 갤러리에서 60여 회의 개인전을 개최했다. 프랑스와 한국을 오가며 활동한 그는 양국의 문화교류 저변 확대에 기여한 바를 인정받아 1996년에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슈발리에’를 받았다. 2013년 대한민국 은관문화훈장을, 2017년 프랑스 문화예술공로훈장 ‘오피시에’를 수상했다. 2013년 대표작 220점을 제주도에 기증했으며, 이를 계기로 2016년 제주도에 제주도립김창열미술관이 개관했다. 서울 평창동의 작업실에서 작업을 이어가며 2019년까지 신작을 발표했다. 2020년 갤러리현대에서 물방울과 함께 문자의 도입과 전개 양상에 초점을 맞춰 기획한 <더 패스> 전이 생전 마지막 개인전으로 남게 됐다. 김성우 기자 [사진 제공=갤러리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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