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초에 소리가 인연에 있었나 보다. 외조부인 고(故) 추담 홍정택 명창(수궁가 보유자)과 외조모인 고(故) 난송 김유앵 명창(춘향가 보유자)의 소리를 듣고 자란 김세미 명창은 열다섯 살부터 판소리에 뜻을 두게 된다. “두 분 모두 무형문화재 셨어요. 소리가 얼마나 고생스럽고 어려운 길인지 아시는 외조부께서는 모친과 외삼촌에게 소리를 만류하셨지요.” 소리를 하고 싶다 해도 들은 척도 않았던 외조부. 그러나 외손녀의 성화에 못 이기는 척 해 보라던 홍정택 명창의 한 마디는 “쓰것다!(되겠다!)”였다. 아무 말씀 없이 한달이 지나서야 ‘정말 해 볼거냐’ 며 기초부터 전수해 주었다. 본격적인 소리는 고(故) 운초 오명숙 명창을 사사했다. 오명숙 명창은 동초제 원류 김연수 선생의 제자이니, 김세미 명창이야말로 동초제의 정통계보를 잇는다고 봐야 한다. “판소리는 자신과의 싸움이지요. 날마다 똑같은 노래를 벽만 바라보고 북치며 부르다 보면 어느 순간 한계에 부딪칩니다.” 간절히 원해서 선택한 소리였지만 어떤 날은 목이 쉬고 또 다른 날은 아랫배가 당겨 고통스럽다. 그러나 너다섯시간을 견디고 강행하다 보면 쉰 목소리에서 어느 순간 실처럼 또렷한 소리가 뽑혀져 나오니, 이 또한 기막힐 노릇이다. “그러면 그 때부터 신이 나서 정신없이 부르는데 돌아서서 십분 정도 지나면 목소리가 아예 안나오게 됩니다.” 목이 쉬어야 비로소 수련인 그 거친 날들 가운데 그녀는 틀림없는 소리꾼이 되어가고 있었다.
흥보가 완창, 잊을 수 없는 공연
지난 6월, 서울 국립극장에서 열린 ‘흥보가’ 완창 무대는 김세미 명창의 소리 인생에 오래도록 남을 공연이다. 판소리 종가의 소릿제를 구현하며 관객과 교감했던 이 무대에서 김세미 명창은 특유의 구성진 가락으로 극장 전체를 휘감았다. “목소리가 예전보다 더 성숙해졌다며 좋아해 주시는 팬들이 고마웠지요.” 판소리의 표현을 빌자면 곰삭은 목소리, 이를테면 무르익을 대로 익은 소리의 경지였다. 무대를 지켜보던 관객들은 스승인 오정숙 명창을 보는 듯 하다며 환호했다. “2001년에 전북예술회관에서 ‘동초제 흥보가 완창’ 발표회를 한 적이 있었는데 그 때는 오정숙 선생님과 외조부모께서 지켜봐 주셨거든요. 젊을 때라 기운도 좋았고 자신감이 넘치던 때였습니다. 이번 무대에도 외조부모님이 살아 계셨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잘한다, 얼씨구”하며 외손녀의 판소리를 기특해 하던 외조부님 생각에 김세미 명창의 눈시울이 잠시 붉어진다. 2001년 남원춘향제 판소리 경연대회에서 명창부 대통령상을 수상한 이후 다양한 무대에서 활동 해 온 김세미 명창은 전북도립극단 창극단 지도위원과 외조부의 호를 딴 추담 전국경연대회의 이사장에 재임중이다. 경연대회 개최와 동시에 올해 10월에는 홍정택 명창의 1주기 추모공연을 준비 중이며, 연말에는 남도민요만으로 구성된 음반을 낼 요량으로 바쁜 나날을 보내고 있다.
오늘도 김세미 명창은 소리를 하기 위해 자리를 고쳐 앉는다. 세상이 인정하는 소리꾼이 되기 위해, 또한 제대로 된 인격을 갖춘 소리꾼이 되기 위해 마음의 끈을 메는 김세미 명창. 그녀의 한 마디에 후학들이 정신을 가다듬는다. “다시 판소리의 세상이 올 것이야.” 분명 판소리의 세상이 오고 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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