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쁨을 주는’ ‘희래등’의 정탁을 맛볼 수 있다는 것은 이 시대의 큰 행운!
“출장요리로 대한민국 어지간한 데는 안가 본 곳이 없죠” “철학은 따로 없어요. 이거지 그저….‘일편단심’ 그리고 ‘오로지 희래등만 바라보고 왔다’” 그가 밝힌 요리의 철학은 이런 것이었다. 정수 그대로였다. 맛의 타협도 변화도 없이 옛날 최고급 요리 그대로 묵묵히 깊은 맛을 추구할 뿐이었다. 견줄 곳 없던 명성의 남산희래등이 외인아파트 철거로 사라지면서 대방동(형 최영근 씨 운영)과 대치동에 다시 열렸고 옛날 전통적 분위기 그대로 고급 중식당의 신비함을 간직하고 있다. 여운이 남는 희래등 고급음식의 담백하고 깊은 맛은 한 번 맛보면 ‘이런 곳은 처음 봤다!’ 외치며 결코 잊을 수 없고 다시 그곳에 발길을 돌리게 한다.
‘최고의 기쁜 순간 늘 함께해온 ‘완다풀‘한 음식 희래등’
“유명한 정·재계 인사들은 음식을 맛있게 먹고는 “완다풀”을 연신 말하며 엄지 손가락을 들곤 했죠.“ 어느 주한 대사는 본토 발음으로 극찬하며 외치기도 했다고 한다. 정·재계 및 주한외국인 출장요리 등 파티와 기쁜 날 함께하던 최고급 음식이던 희래등에 얽힌 재미있는 일화는 매우 많다. 또한 “나이에 비해서 많은 걸 보고 겪었어요 그 당시 희래등이라면 누구나 알던 최고의 음식점었죠.”라며 최대표는 얘기를 이어갔다.
그는 단순한 요리장이 아니었다. 그들과 음식뿐 아니라 마음을 나눈 한 시대의 가족이었다. 신비로운 희래등의 외관과 요리만큼이나 많은 비밀을 간직한 그이기도 했다. 또한, 재한외국인들의 세계요리대회가 희래등에서 열렸을 정도이고 아직도 이국적이던 희래등의 영문 성냥을 간직하는 이도 있다.
잃어버린 원조 특허와 간판
그러한 그의 형제에게 시련도 있었다.
“간판특허를 74년도에 냈었고 남산에서 나와 서초동 법원 앞과 이곳에서 같이 바쁘게 운영 하다 보니 10년 갱신기간을 몰랐던 거예요.. 그래서 갱신이 안 된 사이 누가 특허를 채어갔어요” 그것은 역사적이고 우리나라 ‘간판’이며 상징적 의미 대단한 희래등의 의미가 퇴색되는 순간들이었다. 최 대표는 속상해 털어놓기 어려운 얘기를 쓸쓸하게 이어갔다 .
“가장 속상한 건 오시는 분들이 다 우리를 원조가 아닌 배달만 하는 곳이나 가맹점 분점으로 알고 있다는 거고 특허권 명패조차 그 사람이 가지고 갔단 거죠 그곳과 우리 집만 배달만 하는 곳이 아닌 희래등인데 그것 까지 똑같으니…. 거기를 원조로 많이들 알아요”
스무 군데가 넘는 파생된 희래등 중 유일한 남산희래등이 원조이며 계승자인 최 대표 형제는 현재 특허에 관해 구제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이다. 고집스럽게 지켜온 전통이 무너지는 것도 괴로웠지만, 아류가 생긴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그만큼 존경받으며 완벽하고 유명하며 선구자라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그 아류에 의해 원조의 명성이 퇴색되고 역사가 헤쳐지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어느새 아류가 원조인척하게 되는 현상은 원조에게도 그 아류에게도 좋지 않다. 전통도 사라질뿐더러 그것은 사실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류는 최소한의 예의로 원조를 향한 존경을 표하고 사실을 인정, 바로 잡아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테헤란로 빌딩 숲을 지나 그곳에 가면 일류고급요리 식탁에 앉을 수 있다
독보적 명성의 원조 희래등의 자부심과 전통은 바래는 듯했지만 최 대표는 시련을 딛고 고급스럽고 감동적인 전통 진짜의 맛으로 경쟁하기로 했다.
“시내에 있는 메뉴들이 우리 메뉴들로 나갔다고 볼 수 있을 정도지.” 오늘날 퓨전이라고 혹은 원래 있던 중국요리라고 인식되는 것도 희래등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정통 요리이며 그 옛날 엄청난 가짓수의 메뉴들은 메뉴판이 모자라 줄였지만, 아직도 기본 짜장면, 짬뽕, 탕수육 뿐 아니라 고급요리의 상차림도 여전하다. 먹는 순간에도 반하지만, 오랜 여운과 ‘제대로다!’ 라는 감탄이 절로 나오는 요리의 감동은 며칠이 지나도 가시지 않는다. 칠리새우, 깐풍기, 유산슬밥, 북경 오리, 희래등 냉채, 장우육, 해삼 전복류, 해물위츠, 상어지느러미찜, 탕수어, 특선 바닷가재, 깐풍 새우, 크림 새우 등의 진귀한 요리의 재현과 향연이 제대로 언제든 가능한 거의 유일한 곳이다. 그곳에 가면 예전 정·재계 인사와 외국인들의 일류 식탁에 앉을 수 있다.
4대가 와서 먹는 역사의 산증인의 고급 요리
“배달을 하라고 난리들이었어요 주위에서도…. 그런데 난 전통의 맛과 배달을 하지 않는다는 원칙은 꼭 지키고 싶었어.” 절대 핵심은 타협하지 않았다. 40년 전통 손맛을 지켜내온 최 씨 고집으로 묵묵히 걸어온 길은 존경받아 마땅한 가히 인간문화재급이었고 그 흔한 퓨전요리조차 하지 않았다. “퓨전요리는 내가 감히 생각하기에는 반짝인기라고 생각해요. 희래등의 메뉴판으로 서울 시내 메뉴판들이 탄생하였다고 봐도 좋을 정도로 메뉴조차 원조 그대로인 최 대표는 배움에서도 선구자적이다. 강남 중앙대 외식 산업 CEO 과정 1기 출신이고 총동문회 부회장직을 맡고 있기도 하다. “사람이 많이 모이는 어떤 유명한 행사에 가서 여러분을 만나게 됐는데 우리 구에 희래등이 있었냐며 놀라시기도 하더라.” 4대에 걸쳐 그 맛을 잊지 못하고 희래등을 방문하는 가족들도 많고, 연령층이 높은 경우에는 그 명성을 누구나 알고 있다.
또한, 최 대표는 오늘도 그 감동으로 전통을 묵묵히 지켜나가고 있다. 영롱하고 특별하게 빛이 나는 희래등은 와서 맛본 누구에게나 언제까지나 잊을 수 없고 깊은 감동을 준다. 오해로 인해 원조임에도 단순 가맹점 분점인 것처럼 억울한 탈을 쓰고 있어도 진짜는 역시 진짜가 무엇인지 그 깊이를 보여준다. 아니 맛집이란 타이틀도 감히 역사 그 자체와 역사의 산증인 앞에서 쓸 수 있을까 생각되지만 희래등은 우리의 영원한 고급 중식요리 맛집이다. 그저 앞으로도 그러할 살아있는 전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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