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물어가는 집 한 채가 있다. 볕 좋은 한옥집 툇마루에 ‘장오’와 ‘이순’, 노부부는 손자를 위해 마지막 남은 재산인 이 집을 팔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 새로운 집 주인은 이 집을 팔고 그 자리에 삼층 짜리 건물을 올릴 계획이다. ‘장오’와 ‘이순’은 겨우내 묵었던 문창호지를 새로 바를 준비를 하며 일상을 지속한다. 두 부부는 두런두런 새로울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눈다. 문짝과 마루, 기둥으로 다시 쓰일만한 목재들을 다 떼어 가고 앙상한 뼈대만 남은 집을 뒤로 하고 삼월의 눈 내리는 어느 날, ‘장오’는 집을 떠난다. 2015 국립극단의 봄마당 첫 작품은 배삼식 작, 손진책 연출의 <3월의 눈>이다. 작품은 2011년 (재)국립극단이 서계동으로 둥지를 틀고 백성희장민호 극장 개관을 기념하며 처음 무대에 올렸다. 이후 매 공연마다 전석 매진을 기록하며 관객들의 뜨거운 사랑을 받았던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올 해는 국립극장 달오름 극장으로 자리를 옮겨 관객들을 다시 찾아온다. 배삼식 작가의 탄탄한 대본과 손진책 연출가의 절제된 연출에 좀처럼 보기 힘든 대 배우들의 연기의 향연은 연극이 진실로 배우예술임을 입증하며 세대를 뛰어넘어 평단과 관객의 찬사를 얻어냈다. 그 동안 한국 연극 역사의 산 증인 배우 故장민호, 백성희, 박근형, 변희봉, 오영수, 박혜진이 무대를 빛내주었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로 자리매김한 <3월의 눈>은 세월을 더해가며 생명의 힘을 이어가는‘살아있는 연극’으로 계속될 예정이다.
사라져 가는 모든 것들에 대한 헌사
<3월의 눈>은 누구나가 경험하는 죽음과 상실의 체험을 다루고 있다. 재개발 열풍으로 곧 사라져버릴 한옥의 고즈넉한 풍채, 그 쓸쓸하지만 고고한 모습처럼 이 작품의 이야기도 느림과 여백의 아름다움을 담고 있다. 평생을 일구어 온 삶의 터전이 곧 없어져 버릴 위기에 쳐했지만 그럼에도 장오와 이순의 일상은 담담하고 평화롭기만 하다. 자극적인 내용도, 극적인 반전도 없지만 배우들의 숨소리 하나에도 관객들은 긴장을 늦추지 않는다. 가진 것을 다 내주고 떠나는 장오의 뒷모습은 소멸해 가는 것이 실은 새로운 생명의 옷으로 갈아입는 것임을 이야기한다. 헐려나간 한옥이 책상도 되고 밥상도 되듯이 삶은 계속된다.
나지막하고 긴 호흡으로 전하는 위로와 삶의 숨겨진 진실
수십 년의 연기 인생을 살아온 천상 배우들의 삶과 죽음을 뛰어넘은 내밀한 대화와 담담한 고백이 무대 위에 오롯이 펼쳐진다. 무대와 현실, 연기와 인생의 경계를 넘어 그 자체로 경지에 이른‘삶’의 복원이다. 사라져 가지만 생명력을 잃지 않는 오래된 한옥처럼 작품은 부박한 현실의 한 가운데 흔들리며 찬란하게 빛난다. 사라짐에 대한 이야기지만 그 뒤에 또 다른 세계가 생성되는 우주의 섭리를 말한다. 이 끝없는 순환의 이치는 우리의 인생과 자연의 이치이기도 하다. 3월에 내리는 눈은 따스함을 기다리는 우리네 마음을 차갑게 환상처럼 적신다. 못 본 척 지나쳤던 소중한 사연과 소박한 이야기들이 아련하게 가슴에 스며들며 팍팍한 삶을 위로한다.
대한민국 대표 배우 신구와 손숙이 그리는 노부부의 삶과 인생, 그리고 사랑
손진책 연출가는 반전이나 갈등 없는 이 연극을 있는 그대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작품은 오로지 배우의 힘과 존재만으로 관객들에게 묵직한 감동을 전한다. 이번 공연에는 늘 무대를 지켜오며 범접할 수 없는 깊이를 더해 온 한국 연극의 어른, 배우 신구와 손숙이 함께 한다. <3월의 눈>의 시작이 한국 연극의 중추였던 백성희 장민호 배우의 삶에 경의를 표한 연극이었다면, 이제는 천천히 아래로 그 자리를 내어주고 있다. 두 배우는 풍부한 삶의 경험과 연륜으로 삶과 죽음을 초월한 인생의 섭리와 존재의 성찰을 진솔하게 그려낸다. 격동의 시대를 살아오며 녹여낸 삶 자체가 그대로 연극이 되어 고스란히 관객들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감동은 오직 연극만이 보여줄 수 있는, 침묵 속에 담긴 가장 극적인 여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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