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장현 광주시장은 지금껏 단 한 순간도 ‘광주’를 놓아본 적이 없다. 입버릇처럼 “광주에서 나고 자란 것이 축복”이라고 말하는 그는, 시민운동계의 ‘대부’로, 한국에서 유일한 아시아인권위원회 이사가 될 수 있었던 것 모두 “광주 덕분에 가능했다”고 강조한다.
윤 시장은 1985년 천주교정의평화위원회 부위원장을 맡으면서 시민운동 이력을 시작했다.이 때 ‘영광핵발전소 무뇌아 사건’을 겪으면서 환경공해연구회, 환경운동연합(1992년)을 창립했다. 5·18민중항쟁을 미래로 끌고 가기 위한 활동은 1993년 광주시민연대를 통해 시작했다. “광주의 오월을 한국의 특별한 상황으로 간주할 것이 아니었죠. 세계사적으로 보면 광주는 인류에 중요한 지역이 됐고, 이 가치를 비슷한 아픔을 겪고 있는 아시아 지역에 희망을 주고, 연대하는 일을 통해 구현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환경운동, 5·18 등 광주 시민운동 대부
이후 5·18기념재단의 창립이사(1994년)로 참여했고, 1998년에는 광주시민단체협의회 공동대표를 맡으면서 광주 시민사회운동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2001년에는 한국에선 유일하게 아시아 인권위원회 이사가 됐다. “가장 상징적인 부분이에요. 제가 유명한 변호사·학자도 아닌데 한국에서 유일하게 이사로 참여한 것은 온전히 광주의 몫이죠.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라, 광주 때문에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후로도 그는 기아자동차 광주공장 경영자문위원, 광주·전남 6·15공동준비위원회 상임대표, 한국 YMCA 전국연맹 이사장 등을 맡으며 활동 영역을 넓혔다. 2006년에는 아름다운 가게를 시작하며 ‘나눔운동’의 씨앗을 뿌렸다. 시민운동의 다양한 길을 연 그에겐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별칭이 붙었다.
“시민운동의 대부라는 단어에 대해 부끄러움이 있습니다. 정확히 따지면 저는 전업 시민운동가는 아니에요.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는 진료를 보고, 의사로서 누릴 거 누리면서 남은 시간에 여러 일을 해온 겁니다. 누구 눈에는 프로처럼 보일지 몰라도 그게 아니거든요. 100만 원도 못 받고 일하는 운동가들 보면 늘 아프고 힘들었죠.”
많은 단체를 탄생시켰지만, 그의 ‘것’은 없다. “내 것으로 소유하는 순간 운동성을 잃거든요.”
위암 극복하고 “앞으로”
지난해 9월, 윤 시장은 담담히 암수술을 성공적으로 받고 건강을 회복했다. 그는 “평생 의사로 살아왔지만 수술을 받는다는 현실이 실감나지 않지만 잘 이겨내겠다”고 속내를 밝히면서, 앞으로도 일신의 사정까지 모두 광주 시민에게 공개하는 투명한 시장으로 거듭나겠다는 각오도 전했다. 현재 광주시는 전공노가입 관련 이슈로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 혹자들은 시장의 조직 장악력 부족을 꼬집지만, 기자는 오히려 시장의 절박함에서 표출된 진심을 직시하고 싶다. 조직 내부의 목소리와 대승적 발전방향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윤 시장. 부디 그의 행보가 중도를 벗어나지 않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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