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연말을 보내고, 짤막한 휴가를 보냈다. 2년 조금 넘는 시간 동안 그리스의 곳곳을 다녔다. 뜨거운 지중해의 햇살 쏟아지는 바다도 다니고 그리스에서 느끼기 힘든 습기 찬 높은 산도 올랐다. 휴대폰으로 영화를 보던 중 배터리가 방전된 것 마냥, 그리스에서 내가 가야 할 장소가 고갈된 느낌이 들었다. 결론은 갔던 곳 다시 가보기. 작년에 다녔던 곳 중 중세가 그대로 보존된 모넴바시아가 인상 깊었기에 재방문했다. 둘러싸인 비잔틴 성벽 내부에 중세의 마을을 걸었다. 하룻밤을 모넴바시아에서 보내고 아테네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문득 아직 가보지 못한 곳이 떠올랐다. 소위 말하는 뒷북을 쳤다. 박경철 의사가 쓴 책, <문명의 배꼽, 그리스> 에 등장하는 한 수도원이 있었다. 이름은 프로드로무(moni prodromou). 종교가 없는 나는 이미 관광객들에게도 잘 알려진 메테오라와 루카스 수도원을 수십 차례 방문했었다. 속세를 벗어난 비인간적인 곳에, 가능하지 않을 것 같은 금욕과 절제된 생활을 하는 수도사들의 모습을 봐왔다. 그들을 보며 '종교가 뭐길래'라는 생각을 항상 마음에 두었다. 대체 어떤 종교적 힘이 그들을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현대적 편의의 불모지로 이끌었을까. 그 해답을 매번 또 다른 수도원을 방문하며 찾아보려 했다. 그 끝에, 딱딱한 석회산 절벽에 매달린 수도원, 프로드로무가 있었다. 주차장에 내려 20분 정도 걸어갔다. 내려가고 올라가는 길이 쉽진 않았다. 울퉁불퉁한 길을 따라 걷다 보니 벌목하고 제초하지 않았을 중세에 이곳을 어떻게 찾아갔을까 궁금했다. 조금 긴 산책로 같은 비포장도로를 지나 우리보다 먼저 수도원을 방문하고 돌아가는 그리스 가족들이 보였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걸어오는 그들을 붙잡아 얼마나 더 걸어가면 수도원에 도착할 수 있는지 물어봤다. 힘들진 않았지만 길이 점점 더 험해져 가기에 괜스레 궁금했다. 곧 도착한다는 희소식을 듣고 새해 복 많이 받으라는 덕담을 그리스어로 나누며 지나쳤다. 그리고 올라가던 길 위에 예측하지 못한 장면이 갑작스레 펼쳐졌다. 처음 보는 광경에 압도됐다. 수도승의 고행을 일찍이 알았지만 이 정도일 줄이야. 다 쓰러질 것 같은 목조 지지대가 빨래와 같은 것들이 무작위로 널려 있는 수도원을 힘겹게 들어 올리고 있었다. 혹자는 이곳에서 볼품없다며 실망할지 모르겠지만, 수사의 삶과 역사를 느껴본 나로서는 수도원의 경건함이 남다르게 느껴졌다. 아래로 세월의 흔적이 묻어나는 이끼 낀 돌과 전쟁의 흔적일까 의심되는 화약의 그을린 자국들이 인상 깊었다. 저 기묘한 풍경을 자아내는 수도원이 이내 투둑-하는 소리와 함께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 같았다. 혹여나 1821년, 그리스-오스만 독립전쟁 때 훼손되어 지금의 모습인 걸까, 하는 쓸데없는 걱정을 하기도 했다. 경외와 우려가 섞인 묘한 기분으로 입구를 찾아 올라갔다. 원칙적으로 오후 1시부터 수도원은 닫는 게 맞았다. 우리가 도착한 시간은 대략 1시 50분. 입장 시간을 초과했다. 주변을 기웃거리기라도 할 심산으로 도착했으니 큰 기대는 없었지만, 여전히 입구를 오고 가는 사람들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입장했다. 까만 옷을 입은 수도승들이 우릴 받아주었다. 허용된 시간은 10분이라며 짧게 이야기하고, 곧 닫을 시간이니 서둘러 구경하라며 우릴 재촉했다. 기분 나쁘지 않았다. 들여보내 준 그들의 자비로움에 감사할 뿐이었다. 게다가 여느 수도원이 받는 입장료도 받지 않았다. 받는다 해도 우리나라 돈 3000원 남짓이 다겠지만. 내부의 모습은 단순했다. 오고 가는 수도승 몇 명이 보였을 뿐, 간단한 염료로 부드럽게 깎은 돌벽을 채색한 것이 다였다. 그리고 벽마다 기독교 성인을 그린 이콘(종교적 성화)이 걸려있었다. 내부에는 기술적 한계가 있었던 건지 여전히 석회산의 일부가 꾸며지지 못한 채 남아 있기도 했다.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그 모습이 더 고풍스럽게 느껴졌다. 성화들과 본래 존재했던 산의 일부가 어우러지면서 신비감을 드높였다. 오른쪽으로 이동해, 예배당 안을 들여다봤다. 족히 수백 년은 되어 보이는 낡은 성화들이 부분부분 뜯겨나간 채로 남아있었다. 이곳에 한 남자가 앉아 있었는데, 10분만 보고 빨리 나오라 재촉했던 수도승의 경고를 무시한 채 눈물을 머금은 눈으로 예배당 내부를 응시하고 있었다. 무엇을 향해 슬퍼하고 있었을까. 오직 신을 생각하는 그들의 마음에 동화된 것일까. 고행의 수도생활에 대해 흘리는 존경의 눈물이었던 것일까. 나는 방해가 될 것 같아 서둘러 예배당을 나와 수도원의 발코니에 해당하는 곳으로 향했다. 고갤 들어 올려 봤던 장소를 직접 발로 디뎠다. 생각보다 수도원은 목숨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낡진 않았다. 나무 바닥이 삐걱대는 소리가 조금 나긴 했는데, 그 정도는 분위기 좋은 한옥에서도 날법한 소리였다. 오래된 처마 밑으로는 타종이 걸려있었다. 수도원은 엄격한 규율이 적용되는 사회다. 이 작은 건물 안에도 인간은 공동체를 만들어 살아간다. 자본주의가 만연한 현대사회에 공산의 법칙을 고수하며 정해진 시간과 노동 방식에 맞추어 엄격히 숭고한 노동을 수행한다. 밭을 매고 물자를 수송하며 예배를 하고 성경을 신학적 논리로 해석한다. 이 모든 과정은 시간제한과 물리적 통제를 받기에 타종은 수도원에서 필수 요소다. 마치 군대 기상나팔이 우릴 눈뜨게 하는 것처럼 이 청아한 종소리는 수도승의 귀와 눈을 신을 향해 열어주는 것이다. 살기도 힘든 곳에서 스스로를 옭아매는 삶을 살지만 신이 존재하기에 버티고 희생하며 살 수 있다. 그것이 수도원이다. 종교를 가진 자만이 신을 논할 권리는 없다. 수도원을 보며 새삼 느낀다. 처음 프로드로무를 보며 내가 느낀 것은 박경철 의사의 글과 같이 '와!'하는 탄성보다 '왜?'라는 궁금증이었다. 왜 저곳에 수도원을 지어 올렸으며, 신은 어떤 존재이기에 그들의 삶을 통제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궁극적으로 저곳에서 신이 알려줄 보편적 해답은 무엇일까. 나는 이 모든 것이 궁금했고, 비종교적 관점에서 바라보고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의 대답은 '이해 불가능'이다. 신을 이해하려는 시도 자체가 인간인 나에게 맞지 않을 수도 있다. 나는 이것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프로드로무 수도원에서 살아가는 수도승들의 모습은 신과 종교를 이해하지 못하는 나에게도 비종교적 감동과 고통을 감내하는 삶의 잣대를 선사해주었으니 말이다. 나는 앞으로도 종교가 없이 살아갈 것 같다. 하지만 수도원은 내 마음속 가장 큰 무신론적 위로를 선사하는 종교적 장소임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렇기에 그리스에선 푸른 바다와 하얀 마을 넘어 수도원을 꼭 방문해보길 바라는 마음이다. 글·사진 : 허수빈 / 제공 : 유로자전거나라 (www.eurobike.kr) 02-723-3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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