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오랜 시간을 이어오면서 만들어 놓은 지식은 정신적이면서 물질적인 가치를 가진다. 이것은 인류의 보편적인 가치 규범임과 동시에 한 개인의 삶에서도 중심이 된다. 하지만 이러한 지식이라는 것에 의문을 던지는 예술가가 있다. 바로 파쇄한 종이를 이용한 다양한 입체작업으로 인지도가 높은 박종태 작가다. 그는 자신이 아는 모든 것에 관한 관념 허물기 차원에서 종이 위에 기록된 수많은 글씨를 인위적으로 해체하여 흩트리고 다시 재배열한다. 즉, 문자가 기록된 책을 기존의 형태에서 벗어나게 하여 다른 관점으로 관찰한다. 이렇듯 책이나 문서를 의도적으로 파쇄한 새로운 형태의 작품으로 감상자들의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작은 무언가를 떠올리게 하는 박종태 작가의 작품 세계를 취재했다.
박종태 작가는 10여 년 전부터 서재를 가득 채운 책들을 파쇄하기 시작했다. 박종태 작가는 우연히 최병소 선생의 작품을 접하게 됐고, 그가 종이에 있는 활자들을 끊임없이 볼펜으로 지워나가는 과정들에 대해서 굉장한 감흥을 받았다. 그래서 박종태 작가는 책 속에 있는 활자를 의도적으로 파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후 그가 지닌 책들을 파쇄하여 그간 세상에 없던 독창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했다. 21세기에 디지털 매체를 두고 대치상태인 책의 정체성을 새롭게 구현했다는 평을 받는 박종태 작가는 스위스 내 20년이 넘는 전통을 지닌 쿤스트 아트페어에 3번이나 참가하였으며, 스위스 미술 매체인 ‘INEWS’로부터 극찬을 받는 등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고 있다. 이밖에도 그는 지난해 대구아트페어, 화랑미술제, 청도미협정기전, 경상북도미술협회정기전, 희망드로잉프로젝트 새로운연대전 등에 참여했으며, 올해 3월에는 수성아트피아 호반갤러리에서 ‘심연(深淵)에서 유(遊)’ 초대전을 성황리에 개최했다.
‘종이 만지기’를 통해 작품을 구현해 박종태 작가는 작품에 구체적인 형상이나 패턴 그리고 메시지를 담지 않는다. 단지 감상하는 관객에 의해 그의 작품이 완성될 뿐이다. “많은 활자가 부서져서 각기 다른 수십만 개의 종이 가루가 있습니다. 이 종이 가루를 종이 만지기를 통해 작품으로 구현합니다. 저는 어떤 작품에서 무엇을 말하고 싶다고 얘기하지 않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 있는 작은 무언가 하나를 제 작품을 통해 다시 떠올리고 관객 스스로 어떤 감성들을 발견했을 적에 제 작품은 작품으로서 그 역할을 다한다고 생각합니다. 종이 가루에 각기 다른 활자의 모양들이 다 있듯이 수많은 관객이 각자의 생각과 느낌으로 제 작품과 같이 호흡했으면 좋겠습니다.” 박종태 작가는 자신의 종이 작업을 ‘종이 만지기’ 작업이라고 명명한다. 어떤 한 부분에 있어서 10년 동안 만지기, 만들기를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몸에 배어서 나오는 과정들이 있다. 기교가 없는 기교라고 할 수 있는데, 자신의 몸에 배어서 나오는 그런 기교들이 박종태 작가의 작품에 내재해 있다. 또한, 이 종이 작업은 상당히 많은 시간의 축적과 노동의 과정으로 이뤄진다. 물론 오랜 시간 동안 자신을 가두고 작품활동을 하는 게 힘들기도 하지만 의외로 다가오는 즐거움이 많다고 밝힌 박종태 작가는 어쩌면 이 모습이 구도자의 모습이 아닐까 생각한다고 부연했다.
마음속 깊이 있는 심층에서 즐기자 “조각이나 입체미술에서 많은 재료를 다룹니다. 그런데 그 재료가 굉장히 환경에 유해합니다. 제 작업실 앞에 나무가 있었는데, 어느 날 그 나무가 서서히 말라 죽어갈 때 이를 깨달았습니다. 그때 뼈저리게 많은 반성을 했습니다. 작가가 작품을 만들어서 예술품을 생산하는 과정이 아닌 산업폐기물을 만드는 과정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환경에 조금은 덜 피해가 가는 재료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는 지난 3월 ‘심연에서 유’ 초대전을 성황리에 마쳤다. 심연에서 유는 ‘마음속 깊이 있는 심층에서 즐기자’는 의미다. 박종태 작가는 자신의 작품을 보면서 관객이 언젠가 있었던 추억을 끄집어내면 좋겠다고 소망했다. 앞으로도 박종태 작가의 작품이 우리의 삶을 조금 더 풍요롭게 만들기를 기대해본다. 김성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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