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전시에서 지나 손 작가는 ‘변위(Displaced)’라는 주제를 통해 지난 10년간의 작업 세계를 응축해 보여주며, 자연에서 비롯된 드로잉의 과정을 실내 공간으로 확장하여 관람객에게 자연과 인간, 그리고 공간이 서로 얽히며 생성하는 새로운 감각적 체험을 제공한다.
그는 이색적인 경력을 지닌 작가이다. 편집기자이자 와인 칼럼니스트로 활동했던 손현주(본명)
는 40대 중반에 접어들던 2010년, 돌연 20년간 몸담았던 신문사를 그만두고 고향인 안면도(태안)로 돌아가 사진 작업을 시작하며 작가의 길에 들어섰다. 어린 시절부터 마음 한편에 화가의 꿈을 품었던 그는 2017년 파리로 가 미술대학에서 작업의 기반을 닦았고, 2020년 학업을 마치고 귀국한 후 2021년부터는 지나 손이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며 자신만의 작품세계를 놀라운 규모와 속도로 확장해 가고 있다.
그의 작업은 개념미술(Conceptual Art)의 언어로 사유를 확장한다. 특히 대지미술(Land Art)을 중심으로 이를 기록하는 사진·비디오 작업이 동반되며, 더 나아가 회화·판화·조각·오브제·퍼포먼스·설치 등 다양한 매체를 동원해 ‘개념 드로잉’을 수행한다. 작업의 철학적 기반은 동양의 '공(空)' 개념에서 비롯되는데, 이는 개념미술이 소유에 대한 저항에서 출발했다는 점과 맞닿아 있다. 한 예로 이번 전시의 오프닝 퍼포먼스로 진행되는 〈먹칠하다(Blacken)〉는 곰브리치(Ernst Gombrich, 1909~2001)의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책에 실제로 먹칠을 하여 한 장씩 비워가는 행위를 통해 서양 중심 미술사로 대변되는 제도적 권위에 저항하는 상징적 의식을 시연한다. 기자로서의 언어 감각과 예술가로서의 개념적 사유가 맞물리며, 그는 사유를 미술적 언어로 전환하는 정교한 능력을 지닌 개념미술가로 자리한다.
작가는 줄곧 “자연 속에서 보이지 않는 자리(place), 혹은 사라진 자리가 남긴 흔적과 궤적, 운동성”에 깊은 관심을 가져왔다. 이러한 관심은, 숲의 땅속 생명 에너지를 포착하려 한 〈2월의 숲, 보이지 않는 층위(2017)〉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며, 이후 물질과 비물질, 공간과 비공간 사이의 관계 설정과 그 경계를 탐구하는 일련의 작업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에너지로 현상을 바라보고자” 한다며, 자연과 인위(人爲)의 경계를 넘나드는 드로잉 작업을 통해 기존의 질서에 끊임없이 의문을 던지며 관계의 재배치를 실험한다.
그의 주요 작업들—〈질서_무질서〉, 〈물의 드로잉〉, 〈허공을 드로잉하다〉—은 자연의 힘에 맡겨진 예측 불가능한 변위의 현장이다. 파도에 휩쓸려 흩어지는 오브제들—부표, 튜브, 기와 등—과 허공에 던져진 돌이나 막대, 연기를 피워올리고, 리본을 들고 달리는 행위는 모두 ‘보이지 않는 에너지의 흔적’을 가시화하는, 그만의 표현 방식의 다채로운 변주로 읽힌다.
한편, 미술관 앞마당에 천 개의 감을 펼쳐놓은 <홍시의 초대>는 관람자를 더욱 적극적으로 끌
어 들이려는 새로운 시도로, 작가의 자리를 줄이고 자연의 시간과 타인의 행위가 더해지는 ‘공동 참여 드로잉’의 장을 마련한다. 떫은 감이 숙성되고 발효되는 시간, 그리고 공원을 오가는 사람과 동물의 우연한 참여가 하나의 작품으로 귀결된다. 이처럼 그의 작업은 ‘작가의 부재(the absence of the artist)’를 통해 완성된다. 작가는 최소한의 개입을 실천하며 스스로의 존재를 희미하게 만들고, 결과의 불확실성을 기꺼이 받아들인다. 결과에의 불안과 기대가 공존하는 그 경계 위에서 작가는 그저 ‘기다림’을 즐길 따름이다. 김성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