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는 6.25 전쟁 이후 전국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 발전소, 도로와 같은 기반 시설은 새로운 산업을 일으키기에는 매우 부족했으며, 필수 소비재도 없어 제분(製粉), 제당(製糖), 면방직(綿紡織) 공업은 미국의 원조 자금과 물자를 바탕으로 성장해서 이를 두고 삼백산업(三白産業)이라 하였다. 이런 시기를 아득한 옛날처럼 느끼는 이들도 있겠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1953년에 휴전되었고, 현재가 2025년이니 이제 72년 정도가 지났을 뿐이다.
이 72년 동안 우리나라는 빠르게 발전했다. 자동차를 만들고, 배를 만들고, 컴퓨터를 만들었으며, 지금은 반도체를 만들고 있다. 수십 년간 타국의 지배를 받고, 폐허가 된 나라에서 지금과 같이 발전한 나라는 전 세계에 우리나라가 유일하다. 이런 유일무이한 발전을 할 수 있었던 원인은 문화적인 토대, 뛰어난 인재, 운이 따라 주었던 국제 정세 변화 등 다양한 부분에서 찾을 수 있다.
보다 상세히 알아보면, 우리나라는 세계적으로 위대한 왕으로 재평가되고 있는 세종대왕이 창제한 한글이 있어 문맹률을 빠르게 낮출 수 있었다. 그 당시 우리는 몰랐지만, 한글이라는 문화적 기반이 있었기에 우리나라는 새로운 산업 지식을 빠르게 국가 단위로 축적할 수 있었다. 또한 정주영, 이병철, 최종건, 김종희와 같은 선견지명이 있던 뛰어난 인물들이 산업계에 계속 배출되었다. 이러한 인물들이 있어 몇 단계씩 뛰어넘는 산업 발전을 지속적으로 이룰 수 있었다. 세계에서 가장 선진화된 제조 산업을 보유하고 있던 미국이 우방이었던 것과 정밀 산업에서 세계적인 기술력을 보유해 전 세계를 휩쓸던 일본이 바로 옆에 있던 것은 어찌 보면 행운과 같았다. 또한 동서 진영의 화합이 이뤄지던 1990년대에 중국과 러시아가 옆에 있어 또 다른 발전의 원동력이 되던 시기가 있었다. 늘 열강에 둘러싸인 약소국이라고 평가되었지만, 오히려 그 열강의 틈바구니에 있었기에 발전할 수 있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의 피나는 노력도 있었지만, 신의 축복이 있다고밖에 할 수 없는 상황과 환경도 있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국가 발전에 아직까지 평가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사각지대가 있다. 행정이다. 우리나라는 짧은 시간, 사실상의 왕정과 같았던 정치제도 하에서 인권이 발전한 민주주의 국가로 변모하였다. 그러면서 이 기간 행정기관에서 이뤄진 업적은 다른 역사에 가려지곤 한다. 그러나 뛰어난 공무원들과 올바른 정책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던 학자들이 없었다면 지금의 우리나라는 없었을 것이다.
영국의 유명한 역사학자인 E.H.Carr는 ‘사실 자체는 역사가의 관점에 의해 선택되고 정리된 것’이라고 하였다. 그렇기에 수많은 인간의 활동으로 만들어진 인류의 역사는 지금 시대의 사람들에게 중요하다 평가되는 일부의 역사만 선택되어 기록될 수밖에 없다. 행정의 역사 또한 그러하다.
그러나 행정 영역에 대해서도 더욱 심도 있는 평가와 기록이 이뤄져야 현재 발생하는 문제의 원인을 찾고 개선할 수 있다. 그러지 않으면 누적되어 온 문제의 실마리를 역사 속에서 찾지 못하는 우를 범할 수 있다. 이와 관련된 단편적인 예가 산업 입지 제도이다.
나는 공공기관을 다니며 여러 제조 기업이 부적절한 땅을 매수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는 것을 보고 이를 개선하기 위해 제조 산업 입지 제도를 개인적으로 연구해 왔다. 그러면서 점점 과거 제도에 대해 알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만들어진 산업 입지 제도가 현재의 제조 산업 성장에 크나큰 기여를 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이 제도가 낡아가면서 현재 제조 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되는 것도 확인하였다.
1950 ~ 60년대 제조 산업이 일천하던 우라나라는 단계적으로 제조 산업을 발전시킬 필요가 있었고, 이를 위해 크게 두 가지 행정제도를 정착시켰다. 산업 분류 제도와 산업단지 제도였다. 산업 분류 제도를 통해 육성하려는 산업을 엄격하게 통제하였고, 통계를 바로 산출하여 정책에 반영하였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은 이 제도가 없었다면 성공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산업단지 제도를 도입해 부족한 전력, 도로 등의 한계를 극복하였고, 육성하려는 특정 제조 산업만 산업단지에 들어올 수 있게 하면서 클러스터화해 빠르게 산업을 성장시켰다.
그러나 제도가 수십 년간 유지되면서, 산업 분류와 관련된 업무는 기초적인 행정으로 평가되어 등한시되고 있다. 그러면서 통계 등 여러 행정에 차질을 주는 원인이 되고 있다. 또한 제조 산업 발전에 따라 복합 산업을 할 수 있고 클러스터를 형성할 수 있도록 산업 입지가 공급되어야 하나, 여전히 산업단지는 몇몇 제조업 업종만 허용되는 형태로 지정되어 있다. 이의 개선을 위해 법까지 바꾸고 있지만, 하위 법령인 ‘관리기본계획’을 산업단지별로 변경하지 않아 이전과 다를 바 없는 상황이 존재한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산업단지는 여전히 특정 제조업만 할 수 있다. 이런 곳에 그 외 업종의 기업은 산업단지 밖에서 입지를 찾아야 하는데, 제조 기업에 적합한 공장입지가 거의 없는 지역들이 실제 존재한다. 물론 현재 산업단지 제도에도 합리적인 부분이 있지만, 공장입지 전체를 보면 산업 발전을 위해서는 규제와 제도 운용에 근본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아래는 토지 규제가 제조 산업 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나타내는 이미지이다. 파란색은 산업단지이고 노란색은 공장이 많은 산업단지 외 토지규제지역인데, A 지역과 B 지역을 보면 토지 규제에 따라 공장 건축물 분포에 차이가 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산업단지는 앞서 언급했듯 특정 산업을 육성시키기 위해 조성되는 입지다. 그렇기에 특정 제조업 업종만 허용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문제는 B 지역 같은 곳은 주력 산업에 변화가 올 경우 중소 협력 공장이 들어올 부지가 부족해질 우려가 있다. 실제 이 지역은 특정 제조 산업은 공장 부동산을 구하기 어려운 지역으로 알려져 있다.
제조업은 매우 다양한 산업이기 때문에, 공장입지가 특정 제조업에 너무 편향되게 공급되면 오히려 산업 성장에 걸림돌이 될 수 있다. 예로 비첨단 산업인 식료품 제조업에도 다양한 장비, 설비가 들어가기에 이런 기업도 관련 협력사가 근처에 있을 필요가 있다. 특히 스마트 팩토리화, AI, 로봇 도입 등으로 비첨단 제조 산업도 사실상 첨단화되고 있어 제조 산업별 클러스터화에 대한 관점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점을 볼 때 특정 산업을 육성하기에 산업단지 제도는 여전히 좋은 제도이나, 다른 산업 입지 제도와 함께 상호보완적으로 운용될 필요가 있다.
과거 제조 산업 입지는 공업지역 등 용도지역 토지 규제로 운영되다가 산업단지 제도가 추가되며 행정상 산업 입지가 분화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산업단지 위주로 입지가 공급되었는데, 특정 업종으로 규제하는 산업단지 제도 특성에 의해 규제의 경직성이 강화되었다. 이런 점을 볼 때 산업 입지 관련 행정 규제를 전반적으로 다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철학자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것을 반복하게 된다’라고 하였다. 국가의 발전은 역사의 축적에 의한다. 그리고 그 속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야 같은 문제를 반복하지 않을 수 있다. 그러려면 과거를 다시 되돌아봐야 한다. 산업과 행정의 관점에서.